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제 3세계의 새로운 희망으로 나온 브라질의 룰라와 남아공의 만델라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8. 16. 05:15

    브라질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이 지배하기로 스페인 및 교황과 약속한 땅이었다. 포르투갈이 아시아 경영에 집중하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관심 밖에 놓여 소수의 이주민이 광대한 땅을 임의로 나누어 재배하게 되었고 그래서 처음부터 지방분권이 강했다 16세기 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면서 두나라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자. 브라질의 개척자들이 내륙 오지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때 엄청난 황금광산이 개발되어 18세기까지 황금시대라 불리는 호황을 맞이했다. 포르투갈은 잠시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1807년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아 왕실을 브라질로 이전하였다. 이로써 브라질은 자연스럽게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나폴레옹 몰락 이후 포르투갈 왕실이 본토로 돌아가면서 돈 페드로 황태자가 브라질 왕으로 추대되며 왕국이 성립했다. 이처럼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분국과 같은 왕국으로 출발했다

     

    입헌군주제였던 브라질은 19세기 후반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했다. 커피와 목축업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린 브라질이었지만 19세기 말부터 산업화가 진행되어 농업이 위축되면서 사회적 갈등과 변화에 대한 욕구가 일어났다. 다른 남미 국가들철머 외국자본의 투자처로 전락했다. 외형적으로 경제는 성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군사독재와 양극화로 모순이 심화되었다. 이때 브라질의 새로운 희망으로 등장한 사람이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룰라였다. 1945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룰라는 저학력 단순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산업재해로 손가락 하나를 잃은데다 아내마저 유산 끝에 죽고 말았다. 그는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1970년대 금속노조 위원장이 되었고 이어 좌파 정당인 노동자당을 건설해 당대표가 되었다

     

    1980년대 남미에는 칠레의 아옌데를 계승하여 선거를 통해 혁명을 노리는 좌파 정당과 카스트로를 계승하여 무력항쟁을 노리는 좌파 세력이 공존했다. 룰라는 전자의 노선을 따라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198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1989년부터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좌파정책과 좌파 내부의 분열로 매번 패배하였다. 그는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되었고 2011년까지 10년의 재임기간 동안 브라질과 남미 전체를 변화시켰다. 브라질은 경제성장률은 7%대의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농민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실행했다. 그러자 남미 전역에 좌파정권 수립 바람이 불어 엘살바도르부터 페루까지 남미의 많은 나라에서 무장투쟁이 중지되고 선거를 통해 좌파 정부가 수립되었다

     

    남아프리카는 영국인과 네덜란드에서 이주한 백인 보어인이 경쟁적으로 지배하던 곳이었다. 이에 남아공은 보어인이 영국에 맞서 독립한 나라였다. 하지만 이는 보어인 등 아프리카 백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다이아몬드와 황금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을 뿐이었다. 한편 남아공 백인들은 건국할 때부터 강렬한 흑백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했다. 흑인과 백인은 거주지구가 분리되고 흑인은 정치 참여 등 인권과 기본권이 모두 제한되었다. 축구장에 가도 흑인관람석과 백인관람석이 따로 있었고 화장실이나 편의시설도 차별을 두었다. 1912년부터 저항운동이 있었다. 여기에 만델라는 1918년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나 서양식 교육을 받았으며 1940년대부터 아프리카국민회의(ANC)에서 활동했다. 여러차례 투옥된 만델라는 1964년 종신형을 언도받고 1990년까지 무려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90년대 세계를 휩쓴 독재 정권 타도와 민주화의 물결은 남아공에도 찾아왔다

     

    헥터 피터슨 사건(1976)

    1976년 차별에 항의하는 초등학생 헥터 피터슨을 경찰이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은 상식을 가진 모든 세계인을 분노시켰다. 남아공 흑인과 유색인종은 거세게 저항했고 세계인도 이에 호응했다. 남아공에 경제제재가 가해졌고 국제대회 유치가 불가능해졌으며 유명 예술인들도 남아공 방문을 거부했다. 계속되는 저항에 투옥과 학살로 맞서던 남아공 백인 정권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결국 1989년 클레르크 대통령이 만델라를 석방하고 흑인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등 해결에 나섰다. 마침내 1994년 흑백 차별이 철폐되고 민주적인 대선에서 만델라가 선출되었다. 만델라의 5년 통치는 만만치는 않았다. 특히 백인이 장악하고 있는 경제 개혁은 어려운 문제였다. 여전히 내홍과 갈등을 겪고 있는 브라질과 남아공은 제 3세계의 지위를 지켜나가고 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