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케네디 암살 사건은 누구를 위한 비밀인가 풀리지 않는 3가지는 ?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7. 25. 05:32

    이 사건의 많은 자료를 왜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누군가가 요구하면 국가기밀이라며 거부합니까 ? 누구를 위한 비밀이죠 ? 대체 무슨 비밀이기에 누구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막는 겁니까 ? 바로 그런 국가 기밀이 악취를 풍기며 나타날 때 그떄가 바로 파스즘이 오는 때입니다. 19631122일 사건은 쿠테타였소 ! 이나라는 국민의 것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며 정부가 진실을 죽였다면 국민의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면 그건 이미 내 조국이 아닙니다 ! 케네디 암살 사건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1991)에서 검사의 마지막 발언이다. 검사는 케네디 암살 사건이 일부 정부 조직과 군산복합체가 저지른 일이며 본질적으로 쿠테타라고 주장했다

     

    19631122일 재선을 앞둔 케네디 대통령이 선거 유세를 위해 댈러스를 방문하여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암살범 오스왈드가 쏜 총에 맞았다. 불과 6초 만에 이루어진 이 저격으로 케네디는 목과 머리에 2발의 총알을 맞고 즉사했다. 이후 1964년 대선에서 케네디의 후광을 입어 승리한 존슨 대통령의 시대가 열렸다.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가 반대하던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하어 미국을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뜨린 인물이다. 존손 대통령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자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오스왈드가 결백을 주장하다 사건 2일 만에 잭 루비에게 암살당하고 잭 루비도 1967년 감옥에서 사망하면서 결정적 증인을 모두 잃었다. 또한 몇몇 증거들이 국가 기밀로 2038년까지 비공개 처리되면서 이 사건은 엄청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69년 뉴올리언스 지방 검사 짐 개리슨은 케네디 사건을 독자적으로 수사하여 남부의 힘 있는 경제계 인사 클레이 쇼를 케네디 암살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하여 기소했다. 이 재판 과정에서 케네디 암살에 대한 의혹이 대중적으로 퍼졌고 개리슨 검사는 자신의 견해를 책으로 출판했다. 영화 JFK는 이책을 토대로 만든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제기하는 의혹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암살범 오스왈드는 소총으로 3발 쏴 케네디를 암살한 직후 권총으로 경관을 살해한 뒤 시내 극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변호사 입회도 없이 심문받았으며, 결백을 주장하다 경찰서에서 잭 루바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배후를 밝혀 줄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매직 탄환이다. 오스왈드가 발사한 탄환 3발 중 1발은 케네디의 머리를 맞혔고 또 하나는 오발이되었다. 남은 1발이 케네디와 주지사의 몸에 총 7개의 상처를 냈다. 더군다나 주지사의 상처는 좌우와 위아래를 왔다갔다하며 만들어졌다. 이는 3발 이상의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세 번째는 케네디의 죽임 이후 모든 정책이 뒤집어졌다는 점이다 개리슨 검사는 사건의 동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케네디가 반대하던 베트남 전 참전이 존슨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미국 국방비 지출은 수십배로 중가했고 이는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군수산업과 군부 및 관련 정부 요인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 주었다 개리슨 검사는 이 세가지 의혹을 풀어 나가며 몇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케네디 부검 과정에서 가해진 군부의 부당한 압력, 다른 저격 지점에 대한 증언 묵살, 핵심 증인들의 의문의 죽음, 증거물로 제시된 탄환의 비정상적인 모습, 당시 군산복합체나 군부의 관계에 대한 당사자들의 무조건적 부정 등이 그것이다.

     

    케네디 시대에 냉전이 심화되고 지역 분쟁이 늘어나면서 미국은 자원 수입이나 해외투자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중동전쟁으로 인해 중동 석유 자원을 개발하는 미국 석유회사들이 타격을 입었고 쿠바 공산화로 인해 쿠바에 투자한 미국의 설탕산업이나 오락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 기업은 미국 정부에 강력한 군사력으로 지역 분쟁을 진압하고 안정적인 기업 활동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기업과 정부가 강력한 군사 체제를 만들고자 결합한 것을 군산복합체라 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와 케네디는 이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하지만 케네디 사후 특히 공화당 정치인들은 군산복합체의 요구에 비교적 충실하게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추진하였다. 개인적으로 현정부는 추가 사드배치를 공약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정치적 로비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남북한 군사적 대치를 강화하여 군비지출을 통해 미 군수의 수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