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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 종이를 만드는 사람인 지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8. 12. 05:01

     

    중국에서는 종이를 금처럼 귀하게 여겨 한 조각도 땅에 버리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이를 흙처럼 하찮게 쓰니 그만큼 많이 생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윤원 <임하필기> 조선사람들은 종이와 함께 살아가고 세상을 마쳤다. 책과 편지는 물론이고 벽지, 장판, 창호지에 종이로 만든 옷과 갑옷을 비롯한 다양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쓰이지 않는 데가 없다 초상이 나면 종이로 부조하는 풍습도 있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한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종이는 중국에서도 인기가 많아 조공품이나 뇌물도 활용되었다.

     

    종이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태종은 1415년 조지소를 설치했고 세조는 1446년 조지서로 개편했다. 이곳에는 종이 제작을 담당하는 지장이 배속되었는데 서울에만 81, 지방 221개 군현에 692명에 달하는 인원이 있었다. 6개월씩 3교대로 일한 이들을 위한 위전을 두어 그 소출로 월급을 지급했다. 서울의 조지서늘 기준으로 27명의 지장이 상근했다. 지장 외에도 각종 기구를 만드는 목장 2, 종이를 뜨는 발을 만드는 염장 8, 지방에서 올라와 일하는 선상노, 조지서에 소속된 차비노 90, 벼슬아치를 보좌하는 근수노 5명이 북적거렸다.

     

    죄 지은 사람을 관가에 구속하여 노역시키는 형벌인 도형에 처해진 자에게는 닥나무를 다듬고 만들어진 종이를 두드리는 도침군의 역할을 맡겼다. 조지서의 도침군은 다른 노역에 비해 고되기로 소문난 기피 대상이었으나 종이가 급히 필요했던 세종은 노역형 대상자를 무조건 조지서로 보내곤 했다. 분업이 잘되어서 지장은 종이를 뜨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뜨느냐에 따라 그 품질과 용도가 천차만별이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닥나무와 잿물, 황촉규(닥풀)가 필요했다. 일년생 닥나무를 사용하며 잿물은 메밀대나 고춧대를 태워 만든 재에 물을 통과시켜 만든다. 닥나무를 잿물에 삶은 후 수없이 두드려 닥 섬유를 추출하고 황촉규는 뿌리의 점액 성분을 추출하여 지통에 닥 섬유와 함께 풀어 둔다. 이것을 발로 떠내어 말리면 종이가 만들어진다. 100번의 손질이 필요하다고 하여 백지로 불릴 만큼 손이 많이 갔다

     

    주재료인 닥나무가 많이 필요해지자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닥나무를 심도록 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공납의 폐단으로 닥나무 공급이 어려워지고 지장의 처우가 열약해져 봉급마저 나오지 않게 되자 지장은 점점 줄어들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81명이던 지장이 죽거나 흩어져 4명으로 줄었고 60명이던 도침군도 5명밖에 남지 않았다. 시설도 파괴되어 한동안 복구되지 못하자 지장은 사찰이나 민간에서 종이를 만들었고 조정에서는 지장이 필요할 때만 고용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 조공하는 종이의 수량이 폭증한다. 조정에서는 부족한 종이의 생산을 각 지역의 절에 부담시켰다. 그러자 종이 만드는 고생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도망하여 절이 텅 비어갔다. 이는 종이의 품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18세기 상품경제가 발달하자 지장이 만드는 종이는 더욱 다양해지면서 산림경제에는 원료, 색깔, 두께와 질,. 용도별로 100여종 이상의 종이가 나왔다. 조선후기 실학자 위백규는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종이 사치와 낭비가 만연한 풍조를 비판했다. 또한 탐관오리들은 지장이 납품하는 종이를 퇴짜 놓으며 그 열배에 달하는 뇌물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납품가를 1/100로 후려친다고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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