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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유파동을 겪은 후에 1980년대 자리잡은 신보주수의 물결은 어떠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2. 8. 1. 04:03

    70년대 미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다. 1972년 반대파를 불법으로 도청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했고 뒤를 이은 포드 대통령은 1차 오일쇼크 등 경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데다 베트남 패망까지 지켜봐야 했다. 1976년에 취임한 카터 대통령도 이란의 회교혁명(1979,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치체제를 수반한 혁명)과 뒤 이은 미 대사관 직원 인질 사건 등 미국의 권위가 실추되는 사건을 막지 못했고 2차 오일쇼크(1978) 등 세계적 불경기를 겪었다

     

    불경기와 국가의 위상 추락 속에서 미국은 보수주의가 강화되었다. 특히 교외 거주지에 모여 사는 중산층들의 배타적 성향이 이를 부채질했다. 그들은 학교에서 영어 이외의 언어를 가르치는 등의 다원적이고 포용적인 정책들을 미국적 가치의 포기로 받아들였다. 일부 복음주의 목사들도 보수주의 강화에 앞장서서 이들은 남녀평등이 전통적 가족 가치를 무너뜨린다며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고 창조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정부 규제 철폐, 경제적으로 세금 감면을 원했다. 보수주의 싱크탱크에서 이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면서 과거 개혁과 진보의 터전이던 지식 사회에 보수의 자리가 생겨났다. 특히 80년대 사회주의에서 전향한 뉴라이트들이 큰 활약을 펼쳤다

     

    로널드 레이건은 이런 배경 속에서 1980년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여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을 압도적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되자 엄청난 세금 감면 정책을 토대로 한 경제정책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했다. 그는 8년 동안 모순된 정책을 시행했다. 세금은 대폭 감면하고 기업 규제를 완화하는 동시에 노인들은 위한 복지 예산과 무엇보다 국방 예산을 크게 늘렸다.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는 심각한 수준으로 누적되었다. 레이건과 보수주의자들은 재정적자 문제를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예산 균형 법안을 폐기하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미국을 표방하고 특히 남미에 많은 간섭을 했다. 카리브해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에 좌파 정부가 당선되자 침공하여 정권을 전복하고 친미 정부를 세웠으며 엘살바도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좌익 게릴라 소탕을 적극 지원하고 니카라과에 좌익 정권이 수립되자 이에 저항하는 반군 세력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외에도 리비아를 폭격하는 등 제한적이지만 군사적 침공도 여러차례 단행했다

     

    영국에서도 1980년 보수당이 집권하여 마거릿 대처가 첫 여성 총리로 선출되었다. 강경 보수파 출신인 대처 수상은 노조를 탄압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친기업적 정책을 취했고 대외적으로 남미의 영국령인 포클랜드 제도를 아르헨티나가 공격하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탈환했다. 경제적 실효가 없어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으나 대처는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내세워 전쟁을 강행하고 승리를 이끌어 보수정책을 일컫어 대처리즘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신보수주의는 재정적자와 빈부 격차의 고통을 겪으면서 90년대 중반 경제 악화로 인해 각각 민주당과 노동당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레이건과 대처에 대해서는 역사적 평가가 갈리고 있으며 9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시사평론가는 레이건을 카우보이로 대처를 서커스단 조련사로 묘사하였다. 용감하고 화려하지만 무모해 보인다는 점에서 그럴듯한 비유로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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