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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139년 장건의 서역원정으로 동서교역의 길을 연 비단길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2. 3. 17. 03:21

     

    고대 동서양을 잇는 비단길의 개척자로 알려진 장건은 탐험가는 아니었다. 그가 미지의 세계인 서역으로 떠난 것은 한나라 무제의 명에 의해서였다. 무제는 고대 중국의 오랜 숙원이요 당시의 가장 커다란 현안이었던 북방의 흉노족을 효과적으로 치기 위해 서쪽의 월자국과 군사동맹을 맺고자 했다. 장건은 그 외교사절단장으로서 막중한 사명을 띠고 서역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진한대 중국 북방에서 가공할 위력을 떨쳤던 흉노족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었던 기마술을 스키타이로부터 도입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최초로 흥기한 유목민족이었다. 서양 고대의 몰락과정에서 등장하는 훈족도 바로 흉노의 일파라는 설도 있다. 진시황도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일부를 북방으로 내몰면서 만리장성의 대역사를 이루었다

     

    한고조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무제때에 이르러 국가의 명운을 건 흉노와의 대전쟁이 단행되어 위청과 곽거병 등의 뛰어난 명장을 배출시킴으로써 이들을 외몽고 지역으로 내쫓는데 성공했으나 흉노의 위협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되풀이 되는 대규모 살상전으로 한나라 측의 인명이나 특히 재정상의 손실은 매우 심각해서 염철법 등 신경제정책을 탄생시키는 등 흉노는 무제 집권기의 빛과 그림자로 강력한 존재였다. 어느날 무제는 흉노의 포로로부터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흉노의 서쪽에 월지라는 나라가 있어 일찍이 흉노에 패한 바 있는데, 그 왕은 흉노왕이 자신의 부친의 해골을 술잔으로 사용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단단히 복수를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들과 연합하여 양쪽에서 흉노를 협공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훌륭한 묘안은 없을 것이었다. 이에 사신을 자청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장건이었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100여명의 일행을 이끌고 월지국을 향해 출발했다.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까지 중국인들은 중국의 서쪽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서역이라 하여 막연히 중국의 서쪽 지역 모두를 지칭했는데, 그 서역이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좁게는 타림분지 주변을 넓게는 중앙아시아 전역, 나아가서 서아시아까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장건 일행이 월지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고 그들이 국경을 밟는 순간 흉노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장건은 10년이 넘는 억류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동안 흉노족의 부인을 얻고 자식까지 두었지만 그는 사절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탈출하여 마침내 월지국에 도달했다

     

    옥문관
    양관

    월지국은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여 남러시아의 소그디아나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미 비옥한 지대에 안주하고 있었던 그들은 옛 원한을 되살려 흉노를 정벌하는 모험에 쉽게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교섭에 실패한 그는 타림분지 남쪽 즉 천산남로로 귀국했는데 또 다시 흉노에 억류되었다가 다시 탈출하여 마침내 귀향에 성공했다. 그때가 기원전 126년이었다. 실로 13년간에 걸친 대장정으로 장건의 위대한 집념의 결실이었다. 흉노 부인과 종자 감보만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의 서역 견문은 무제를 비롯한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으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제 중국인들에게는 월지 외에 대원, 오손, 강거 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이 전해졌다. 인도의 존재도 이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장건은 기원전 116년 다시 오손과 연합하기 위해 서역으로 갔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돌아왔다. 특히 무제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은 서역 제국의 신기한 물산보다 명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건이 말하기를 대원국은 천마의 후손으로 일컫어지는데 피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의 산지라고 했다. 무제는 명마를 얻기 위해 대원국(우즈베크스탄의 베르가나)에도 정벌의 군대를 보냈고, 이광리는 중국사상 최초로 파미르 고원을 넘은 군사가 되었다. 한나라의 위력은 서역에 떨치게 되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 국가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들을 통해 서아시아, 심지어 대진국(로마)의 문물도 교류되었다. 그 동서 문화 교통로의 이름이 바로 비단길로 이길을 통해 서역에 전해진 중국의 대표적인 물산이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포도와 석류, 호도, 낙타, 사자, 공작, 향로 등이 중국에 전래되었고 중국의 비단, 칠기, 약재 등이 서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들 교역품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교류는 대중적 수요에 기초한 광범위한 것이 아니라 사치품을 위주로 한 귀족들 상호간의 교류였다. 로마의 귀족들은 중국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아름다운 광택에 매료되어 이를 사기 위해서는 어떤 비싼 값도 마다하지 않았다. 실크로드는 하서회랑을 지나 돈황에서 곤륜산맥을 따라가는 서역남로와 천산산맥을 따라가는 서역북로로 나뉜다. 특히 선제 시기 서역도호부가 설치되면서 빈번히 교류가 이루어졌고 왕망때 주춤하다가 후한 명제 때에 다시 서역과의 외교가 회복되었다.

     

    반초

    비단길을 이야기할 때 후한 대의 반초를 빼놓을 수는 없다. 반초는 궁정 관료 반표의 아들로 <한서>의 저자로 유명한 반고의 쌍둥이 형제다. 전한대의 대역사서인 <한서>의저자로 유명한 반표로부터 시작하여 반고에 의해 저술되었고, 반고가 죽은 후 고대중국의 가장 뛰어난 여성지식인인 그의 누이동생 반소에 의해 완성되었다. 반초는 뛰어난 무장으로 30년간 서역의 경영에 주력하여 흉노 치하에 있던 카스피 해 이동의 50여국을 복속하고 비단길을 장악했다. 부하 감영을 파르티아(이란)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로마 시절에 파견하기도 했다. 반초의 아들 반용의 활약도 컸다.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은 7세기 중엽 당나라때에 가장 번성하여 당나라의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운는 동력이 되었다. 동서양의 각종 산물과의 함께 각종 종교, 음악 등 민간의 교예, 기예, 풍습 등도 이길을 통해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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