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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테네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리스 문명와 화페 경제로 통해서라고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5. 17. 04:35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지중해 연안으로 전해지면서 고대 문명의 무대는 지중해로 확장되었다. 기원전 20세기경 크레타 섬은 올리브 재배와 선박 건조와 지중해 무역에 앞장서며 크레타 문명을 꽃피웠다. 그리스 신화에서 황소 머리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살던 미궁이 바로 크레타의 수도 크로노스였다. 미케네 문명권인 소아시아 반도의 트로이도 농업으로 번성했다.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배경이 된 도시국가이다. 그러나 크레타는 지진으로 몰락하고 트로이는 전쟁으로 쇠퇴해 지중해 상업 패권에 공백이 생겼다. 때마침 기원전 12세기경 크레타와 트로이를 대신해 지중해 상권을 차지한 진취적인 해양민족이 나타났다. 최초의 상업 민족으로 불리는 페니키아인이다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 지역에서 출발한 페니키아는 지중해 전역을 내집 앞마당처럼 누볐다. 페니키아라는 이름은 자줏빛 염료의 땅이란 뜻이다 그리스인들이 이곳 사람들을 포에니키스 즉 자색의 사람으로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 페니키아인들이 값비싼 자줏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성장했다. 특히 양질의 레바논 삼나무를 이용한 선박 건조 기술과 원거리 항해기술로 지중해 전역에 진출해 키프로스, 시칠리아, 샤르데냐, 세비아 등 30여개의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서지중해 끝인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한 것이다. 훗날 로마제국과 세차례 포에니 전쟁을 벌인 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800년에 세운 식민도시였다

     

    페니키아인들은당시 최고의 선진국인 이집트 파라오의 무역대리인이 되면서 지중해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페니키아의 도시 비블로스는 이집트의 파피루스 무역을 독점했다. 비블로스에서 유래한 단어가 바이블이다. 페니키아은 삼나무, 소나무 등 목재와 직물, 염료 등을 수출했지만 주된 활동은 지중해 연안의 각종 특산물을 사고파는 중계무역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금은 장식품, 도자기, 포도주, 상아, 공예품 등을 각 특산지에서 사들여 필요한 지역에 공급했다. 심지어 노예까지 사고팔았다. 장사의 달인이었다 페니키아는 400여년간 번영을 누렸지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무역이 위축되어 몰락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를 토대로 22자의 알파벳을 만들어 지중해 전역에 전파했다. 알파벳은 그리스와 로마로 전해져 오늘날 유럽의 모든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로 발전했다. 페니키아의 활약으로 고대 세계사의 중심이 동방에서 지중해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기원전 10세기경 그리스에는 소규모 도시국가인 폴리스들이 형성되었다. 초기 폴리스는 인구가 수백, 수천명에 불과했고 폴리스 숫자는 최데 1천여개에 달했다. 폴리스는 촌락 단위의 농업 중심지이면서 무역의 창구이자 방어의 거점이었다. 그리스는 산지가 많고 토양이 척박해 올리브와 포도외에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인구가 늘자 식량부족을 겪어야 했다. 폴리스들은 에게 해의 섬들과 소아시아 해안, 이탈리아 반도, 프랑스 해안 등지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시칠리아, 나폴리, 마르세유, 모나코, 이스탄불 등이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출발했다. 그리스가 페니키아인들의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폴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아테네는 상업 중심지고 스파르타는 군사 중심지였다. 둘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아테네는 활기찬 상업도시답게 올리브, 포도, 도기를 수출하고 곡물과 노예를 수입하는 무역국가로급성장했다.

     

    라우리온 은광

    여기에다 기원전 483년에 라우리온 은광이 발견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전성기에 아테네 인구는 최대 30만명에 달했다. 이중 1/3은 노예로 은광, 건축, 수공업, 농업에 종사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 리디아 왕국에서 처음 사용된 금화를 본떠 상거래 시 은화를 사용하면서 무역을 더욱 활발해졌다. 그 덕에 페르시아 전쟁떄 군함 수백 척을 건조해 맞설 수 있었다. 무역과 은광으로 축적한 경제적 기반은 철학, 예술 등 수준 높은 고대 문화를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스파트타는 다수의 원주민인 아키이아인을 정복해 형성된 농업기반의 도시국가였다. 기원전 4세기 스파르타의 시민은 약 2천명에 불과한 반면 상공업에 종사하는 반자유인이 2만명, 원주민인 예속농민이 5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민 1명당 30명 내외의 반자유인과 예속농민을 거느린 소수 지배 다수 피지배의 이원적 사회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스파르타는 시민의 아이들이 7세가 되면 엄격한 집단 교육을 통해 전투병사로 키워 국방과 치안을 유지하는 군사국가였다. 아페네는 상업과 무역중심의 개방적 폴리스였던 반면 스파르타는 농업과 군사 기반의 폐쇄적 폴리스였다

     

    두 라이벌이 서로 협력한 것은 흑해에서 인도 북부까지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가 침공해 왔을 때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492, 490, 480년 세차례나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다리우스 대왕이 이끈 2차 원정은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에 격퇴당했다. 3차 원정때는 크레르크세스 1세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다. 영화 300의 소재가 된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의 결사대 300명이 비좁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 육군을 저지했지만 전멸했다. 결국 아테네까지 점령당해 철저히 파기되었고 하지만 아테네 해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퇴하면서 그리스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200여개 폴리스와 함께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델로스동맹의 기금을 유용해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 재건에 나서 다시금 아테네의 전성기를 열었다.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의 제국으로 변질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스파트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대립하던 두 동맹이 기원전 431-404년 전면전에 나선 것이 펠로폰네소스전쟁이다. 여기에 스파르타가 승리해 그리스의 주도권을 가져갔으나 스파르타는 다시 그리스는 거듭된 패권 다툼 속에 내분이 심화되어 결국 기원전 338년 북방에서 일어난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하다

     

    그리스는 은화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화폐경제 체제까지 갖추었다. 물물교환을 대체한 화폐경제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그리스의 번영을 가속화시켰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상업을 천시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스 신화에서 상업과 발명의 신 헤르메스는 로마신화에서 메리쿠리우스로 불린다. 이는 장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메르카리에서 나왔다. 영어 상인인 merchant의 어원이다. 헤르메스는 상업의 신인 동시에 도둑의 신이기도 했다. 상업과 도둑을 동격에 놓인 것을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상업에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무역과 화폐로 상업의 꽃을 피운 아테네조차 상공업은 노예들이 담당했다. 상업 천시 풍조는 기원전 350년경 활동한 플라톤과 아리스토델레스의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관심은 가정과 국가의 살림을 현명하게 운영하는데 국한되었다. 경제란 뜻의 economy는 집의 관리의 의미로 그리스 경제는 가정관리 정도의 개념에 불과했던 셈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는 상업과 제조업은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보고 외국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경제관은 기본적으로 집단 소유와 자급자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역, 사유재산, 화폐 등의 중요성을 강조해 많은 경제사들이 그의 사상을 경제학의 원조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궁극적 가치는 행복한 삶이며 재화는 그것을 위한 종속적 가치이고 화폐는 그 재화를 얻는 수단으로 봤다. 그는 경제는 가계경제와 상업경제로 구분했다. 가계경제는 행복한 삶을 위해 상업경제는 화폐획득만이 목적이란 것이다. 가계경제는 자연스럽지만 상업경제는 비정상적이어서 자연에 반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돈벌이를 위한 이윤 추구나 영리적 상업 행위를 불신했는데 이는 이득을 보면 한쪽은 손해는 보는 제로셈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거의 2000년동안 이어졌다. 동양의 유교가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질서 속에 장사를 천시한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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