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 중심제에서 정당정치는 어떻게 발달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5. 30. 03:42

    고토쿠 슈스이
    메이지 천황

    전쟁의 목적은 식민지와 신시장 확장에 있고...전쟁은 항상 정치가와 자본가를 위해 벌어지며, 영토와 시장은 항상 정치가와 자본가를 위해 개척할뿐이므로 다수의국민, 다수의 노동자, 다수의 빈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만약의 전쟁의 비참, 어리석음, 손실을 직언하는 것을 역적이라 이름 짓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역적이 되겠다 - 일본의 좌익 정치가이자 사회당의 지도자인 고토쿠 슈스이가 러일전쟁에 반대하며 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1905년 당시 일본은 이미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정우회, 국민당, 사회당 등이 활약하며 정당정치를 꽃피우고 있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1873년 일본정부는 두파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의 주제는 정한론 즉 조선정벌이었다. 정한론을 주장한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이고 반대한 이는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일본의 근대화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싼 정한론 논쟁은 천황이 오쿠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사이고 지지 세력이 줄줄이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이고는 몰락한 무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무사들은 세이난 전쟁 이후 패배하고 사이고는 할복했다. 정계에 은퇴한 이후로 반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국회 설립과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자유민권운동을 일으켰다.

     

    이토 히로부미

    그들은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사쓰마 번과 소슈 번 출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장악하고 천황의 총기를 흐리고 있으므로 이를 견제할 장치로 국회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 의회민주주의와 달리 천황을 정점으로 그 밑에 파벌들이 정당을 형성하고 권력투쟁을 벌이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천황과 정부의 결단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오쿠보 도시마치가 암살당하고 민권운동 가담자들이 탄압을 받는 등 복잡하고 격렬한 정치투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오쿠보 도시미치의 후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온건한 형식의 헌법이 만들어졌다.

     

    헌법은 천황의 권력을 성문화하는 수준이었고 이어 치러진 총선과 그에 따라 구성된 의회도 정치 파벌 정도였다. 의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유권자는 국세를 15엔 이상 내는 25세 이상 성인 남자로 전 국민의 1.1%에 불과한 지주 등 상류층이어서 민의의 대변은 요원했다. 의회 제 1당인 입헌민주당은 이토 히로부미 정부와 대립하면서도 천황을 위한 군함 건조에는 찬성하는 천황 중심 체제에 순종적이었다. 점차 민의를 대변하는 세력과 정당이 출현하는데 여기에는 산업혁명 진전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큰 영향을 미쳤다

     

    청일전쟁

    1870년대부터 일본 정부는 식산흥업 정책에 따라 공장 설립, 철도 부설 등에 집중 투자했다. 이를 토대로 1880년대부터 대규모 공장들이 설립되고, 미쓰비스와 미쓰이 등의 재벌이 성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받은 배상금으로 건립한 야하타 제철소를 비롯하여 중화학공업이 발전하면서 1900년대가 되면 일본의 산업은 여느 서구 열강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수준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산업이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이 급증했고 이들이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항의하며 생존권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866년 제사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최초의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따라서 초기 산업화의 주역인 면방직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이후에는 중화학공업이 발전하여 숙련된 남성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여 노동쟁의를 벌였다

     

    일본은 마르크스의 나라인 독일과 교류가 빈번하여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으며, 정부가 초반부터 악랄하게 노동운동을 탄압하여 서로간의 갈등 수준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1901년 사회민주당이 만들어졌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된 후 1906년 고토쿠 슈스이를 중심으로 일본 사회당이 건설되었다 1900년 이후 사회적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다양한 형태로 분노를 표출하고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등 참정권 운동이 활발해졌다 1910년대 일본 민주주의 발전,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맞이하여 일본 정당정치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신전쟁
    도야마 미쓰루

    < 야쿠자의 전신은 천황 행동대라고 하는데 >

    1868년 천황의 친정 선포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신정부에 굴복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막부가 동원한 무사들은 신정부가 동원한 농민 출신 군대를 얕잡아 봤지만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보신전쟁이라 불린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무사세력 몰락하였다. 하지만 천황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일부 무사층이 천황의 친위대로 불법 행동을 맡게 된다. 이들이 바로 광개토왕 비문을 위조하고 만주와 한반도에서 첩자 노릇을 한 대륙 낭인들이다. 몰락 무사 중 한 사람인 도야마 미쓰루는 천황을 위해 친위대를 꾸렸고 김옥균을 후원했으며 을미사변을 간여하여 상당한 돈과 조직을 만들어 어둠의 조직 총수가 되었다. 이 조직이 오늘날 일본 야쿠자의 효시다. 조선 야쿠자의 두목 하야시 등도 여기 가담한 인물이라고 한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