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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2천만의 민족 저항을 일으킨 남녀의 혈로 작성한 3.1일 운동의 의미와 전개과정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4. 2. 29. 03:37

    삼일절 ! 이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니 진실로 상제가 허허신 날이오. 이날은 일이 개인이 작정한 것이 아니오. 2천만이 하였고, 다만 소리로만 한 것이 아니오. 순결한 남녀의 혈로 작정한 신성한 날이오 < 안창호, 3.1절 제 1주년 축사에서 >. 3.1운동은 3천 년간 이어진 봉건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국가 건립의 개시를 알리는 운동이었다. 3.1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식민통치를 뒤엎고 대한민국의 건립을 알리는 운동이었다 <독립운동가 조소앙 >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선언일로 지정해 처음 국경일로 기념했다. 1946년 미군정시기에도 국가경축일로 지정되었다.

     

    상해임시정부수립(1919.4.11)

    1948년 제헌 이래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에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친일재산귀속법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리면서 그 사유로 3.1운동의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함이라고 판시한데서 알 수 있듯,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3.1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민주공화국 체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됐다는 데 있다. 즉 대한민국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광복절이 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삼일절과도 관련이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민주주의 제도의 임시정부 수립 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민국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태화관 기미독립선언서 발표
    삼일절 기념행사(임정, 1920.2)

    삼일절 며칠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빈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고 잡혀갈 예정이었으므로, 백업 요원으로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실제 시위를 이끈 15일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이중 박희도,최린,최남선이 서너명이 훗날 친일로 변절했지만 나머지 인원은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9년 삼일 운동이후 19202월 임시정부는 성대한 식전 준비를 했으며 3.1일 당일 상하이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국기가 나부키기 시작했으며, 정부 차원의 경축식은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여기에는 여운형 교민단장 연설과 이동휘와 안창호의 축사가 있었다. 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와 국내 주요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쿠바 심지어는 일본 등 각국의 도시에서도 치러졌는데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300명의 한인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단 차량과 간호복을 입은 여성 등이 시가행진을 했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1920년부터 사용되었으나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명칭은 독립선언기념일이었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쌍심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Fourth of July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천정절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피난을 함에 따라 간소하게 경축식을 이어갔다. 중국측 언론에서도 3.1절을 한국 혁명기념일로 표현하는 등 한인의 국경일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주의회에서 3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인 19463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하였으며,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문재인 정부시 100주년 삼일절 기념식(2019)
    북한의 삼일절 행사

    1950년대까지 삼일절에는 명절처럼 상점들이 일제 철시하고 국기를 내걸었으며 음악회, 학예회, 시열식, 시가행진 등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19615.16 쿠데타 및 1965년 한일협정 이후 3.1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사실상 남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3.1절 경축사가 사실상 정부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19993180주년 이후로는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며 만세행진 재현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사학계에서는 3.1운동의 본질은 민족공동체의본질적 주권을 바탕으로 자주독립을 선포한 것이고 우리가 아는 만세시위는 그러한 독립선언서을 축하하기 위한 요식행위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세운동을 한 것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2019100주년에 문재인정부에서는 대대적인 행사로 국민대표 33인의 행진과 독립선언문 낭독이 진행되었고 유관순 열상에게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광장에서는 만세행진과 시민 3천명의 대합장 행사도 있었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경축일과 같은 의미의 명절이 아니며 공휴일도 아니다. 북한도 3.1운동을 기념하지만 마르크스 역사발전단계론의 중시하여 민족대표 33인이 중상계급 이상의 부르주이자이자 종교인이라는 점 그리고 김일성이 지나치리 만큼 게릴라식 항일무장투쟁이 중시하여 평가절하된 점이 있다

     

    191931일 오후 2시 종로 한복판 탑골공원에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은 민족대표 33명이독립선언을 한다고 해서 모여들었다. 230분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달았다. 그리고 파고다에 모인 학생과 민중들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 시위대는 무교동에서 대한문 쪽으로 나아갔고 다른 시위대는 남대문역에서 서대문으로 향했다. 3.1운동 시위는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일반민중이 중심이 되어 촉발되었다. 같은 시간 민족대표 33인은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을 취소하고 태화관에 모여 별도의 독립선언서를 가졌다. 이소식을 들은 학생대표 강기덕과 한위건은 태화관으로 달려가 33인에게 파고다로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비공개리에 태화관에 모인 29인 민족대표들은 한용운의 연설이 끝난 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공약 3장을 낭독했다. 29인은 모두 연행되어 갔다 이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원했다고 한다

     

    학생운동이 농민대중운동으로

    시위 첫날부터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서울 장안은 만세소리와 시위운동으로 극도로 흥분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34일 전문학교와 중학교 대표자들은 배제학당 기숙사에서 35일 학생들을서울역 광장에 집합시켜 다시 시위를 벌이기도 결의했다. 이 운동에 가담하려고 2백여명이 평양에서 새벽차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역광장에서는 학생과 일반인 등 5천명이 모였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대문을 향해 행진했다. 행진도중 독립을 선포하는 각종 격문과 태극기 물결이 시위군중 사이를 메웠다. 만세시위에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참여했는데 이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일어교과서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당시 2학년인 윤봉길 의사는 자진퇴학하여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310일쯤부터는 전국의 수많은 농촌에서 농민들의 시위가 잇달았다. 이제 삼일운동은 학생주도에서 농민주도로 바뀌고 3.1운동이 민족해방을 위한 조선민중의 전국적인 봉기로 번져가면서 동시에 일제 헌병경찰의 탄압 또한 심해져갔다.

     

    민족열사 유관순 수감
    수원 제암리 학살

    415일 아리타 도시오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수원 제암리에 들어가 주민들 중 기독교인과 천주교도 30여명을 소집했다. 이들을 교회안에 들어가게 하고는 밖에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총을 난사했다 교회당 안의 사람들은 거의 사살되었다. 일병은 교회에 불을 질러 건물을 태워버렸다. 이 학살로 39명에 달했다고 한다 근처의 마을에서도 매일 이와 같은 학살이 벌어졌다. 이것은 당시 일본군의 학살 중 가장 잔인했던 수원 제암리 학살현장이었다. 일제는 살상은 부득이한 것으로 하고 화재는 실수로 인한 것으로 되었다고 한다. 일본헌병 통계에 의하면 당시 총 776회 시위가 있었고, 거의 51만명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7500명이 죽었고 16000명이 상처를 입었고, 47000명이 감옥에 투옥되었다 최고형량인 징역 3년 이상을 선고받은 이가 5백여명 이르렀다. 3.1운동의 주역은 33인 지도급 인사가 아닌 학생과 일반민중들이었다. 게다가 학생들의 파고다 선언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3.1운동은 성사되기 힘들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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