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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성세력은 물러가라며 일어난 1960년 4.19의거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3. 4. 19. 03:16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 8. 15)

    19485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정식 선포되어 임정 이래 제1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임정시절부터 보여준 행각으로 최소한 민중적 기반도 갖지 못했다. 그는 권력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소수의 추종세력과 친일 및 부일 관료들을 요직에 앉혔다. 친일 및 추종세력들을 결집한 이승만은 집권초기부터 독재권력 강화에 주력했다.

     

    자유당 창당(1951)
    공비소탕 비상계엄(1952)

    그는 제 2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자신이 국회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점차 독재적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이승만은 195111월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부결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 장악과 재선을 위한 재선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정당의 필요성을 절감, 추종세력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했다. 이승만은 19525월 공비잔당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경남과 전라남북도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발췌개헌(1952)
    사사오입 개헌(1954)

    그리고 통근버스를 타고 가던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연행하여 반대파 의원 10여명을 감금하는 등 폭압적인 방법을 써서 대통령 직선제인 발췌개헌안을 기립투표로 통과시켰다. 8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관권을 총동원한 이승만은 마침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자유당은 1954년 민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승만의 3선의 목적으로 중임제한 철폐를 위한 헌법개정을 추진했다. 표결 결과 헌법개정이 부결되었으나 다음날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궤변을 내세워 가결을 재선포했다. 이승만 종신집권이 선포였다.

     

    제4대 민의원선거(1958)
    국가보안법 날치기 통과(1958)

    그러나 이때부터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떠났다. 195852일 제4대 민의원 총선거를 실시했는데 자유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총선거는 부정투성이였다. 게다가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차기선거를 대비하기 위해 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보안법 개정안 통과를 막기 위해 태평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철야농성하던 야당의원들을 국회의장의 경호권을 발동하여 내쫓거나 감금시킨 후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신년도 예산안을 포함, 국가보안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2.4파동을 일으켰다.

     

    3.15 대통령 부정선거(1960)
    마산 김주열 최투탄 사건

    19603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은 또 한번 40% 사전투표와 3인과 5인조 투표, 개표조작 등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그러나 3.15부정선거는 잠재되어 있던 반정부 감정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었다. 부정선거 반대운동은 점차 전국각지로 확산되어가던 중 411일 마산에서 김주열이 최루탄에 맞아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4.19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고려대 피습 사건
    4.19 혁명

    418일 서울, 정치폭력배들이 시위를 벌이던 고대생들을 습격과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서울의 10여개 대학생들을 일제히 항의시위에 돌입했다. 시내 중심가에 운집한 2만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기성정치인들의 각성과 재선거를 촉구하면서 경무대로 향했다. 당황한 경찰들이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그결과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시위는 계속 확산될 뿐이었다. 계엄선포로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시위는 재야인사들의 항의 시위와 대학교수들의 시위를 계기로 다시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승만 하야 성명(1960)
    제 2공화국

    426일 대규모 시위가 빚어지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사퇴, 3.15선거 무효 등을 발표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이승만은 다음날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이 축출된 후 허정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민중항쟁에서 표출된 민주화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역사의 시계바늘은 다시 역회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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