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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사랑에 내란죄로 처벌된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모를 밝히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3. 10. 9. 03:29

    함남 성진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일본 메이지대 출신의 박병엽은 반시국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은 박병엽의 집을 수사하다 박의 조카인 박영옥의 일기장에서 국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경찰은 이것을 구실로 박영옥과 그 친구들을 잡아들였다. 경찰의 신문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당시 국어라면 일어를 뜻하는데, 일어를 사용하여 처벌을 받았으면 이것은 중대한 반국가행위라는 것이다. 경찰은 일어사용을 못하게 한 자들의 이름을 대라며 이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고문 끝에 이들은 영생여고 선생인 정태진, 김학준 등의 이름을 대고 말았다. 정태진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영생여고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가서 마침 조선어학회 사전편찬 일을 돕고 있었다. 경찰서로 연행되어온 정태진은 심한 고문으로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라고 허위자백했다

     

    194210월 함남에서 일어난 이 작은 사건은 마침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정태진의 자백 이후 홍원경찰서는 조선어학회로 달려가 장지영, 한징,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등 29명을 구속수감했다. 홍원경찰서에 수감한 이들은 4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았다. 홍원경찰서는 이 사건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재판에 부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는 3.1운동 이후 번지기 시작한 신문화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그러나 그 기원은 1896년 독립신문사 안에 조직된 국문동식회다. 독립신문의 국문판 교보원으로 참가한 주시경이 통일된 맞춤법 격식을 연구할 필요성을 느껴 독립신문사 안에 조직한 것이 바로 국문동식회였다. 주시경 제자인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이 뜻을 모아 다시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었다.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은 192611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한글기념식을 갖고 오늘날 한글날에 해당하는 가갸날을 제정하여 한글의 중요성을 알렸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명칭을 조선어학회라 개칭하고 한글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했다. 조선어학회는 사전편찬의 기초작업의 하나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어 1933년 한글반포 487회 기념일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어 맞춤법 통일과 표준말을 모으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그야말로 민족운동의 새바람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한국말과 한글 말살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1940년 한글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19414월에는 문예지인 문장과 인문평론도 폐간되었다. 공식적으로 한국어와 한글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최후로 남은 것이 바로 한국어문 운동의 총본영인 조선어 학회였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위해 구실을 만들려고 눈이 빨개 있던 중 마침 홍원사건을 기화로 조선어학회에 탄압의 칼날을 들어댄 것이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있은 후 일제의 갖은 고문을 받은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순국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을 기도한 민족주의 단체라고 판결하고 구속자 중 16인을 기소했다. 1심에서 재판부는 이극로에게 징역 6, 최현배에게 4, 이희승에게 3년반 등이 선고되었다.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1945813일 기각당했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하에서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고자 한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불멸의 공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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