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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분단정부 수립후 이어진 동족 상잔의 비극 1950년 한국전쟁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3. 6. 26. 03:54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소산이었다.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편 미소 강대국에 의해 한국의 해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해방은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이어지지 못하고, 두 강대국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군사적으로 점령당하는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 일부라도 직접 점령하고자 북위 38도선을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을 소련에 제의했다. 38도선은 신탁통치기를 겪으면서 임시 군사분계선에서 차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으로 바뀌어 한국전쟁 발발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1947년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유엔총회에 한국독립문제를 제출했다. 유엔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결과 정부가 수립되며 미소 양군은 철수할 것이며, 이 실현을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할 것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유엔임시위원단은 19481월부터 활동을 개시했는데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는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이에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남북협상파가 불참한 가운데 총선거가 실시되어 19488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도 독자적인 정권수립이 추진되었다

     

    825일 북한의 각 시군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527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 최고인민의회 제 1차 회의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리하여 19489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통일된 자주국가를 수립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를 탄생시켰다. 분단국가의 수립은 내전의 발발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게다가 한국의 정치적 불안은 침략의 좋은 구실을 주었다. 국민들의 불신을 안고 있던 정부 여당은 19505월 총선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 위에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인 방위선 밖에 있다는 미국무장관의 발언은 북한에게 남침의 빌미를 제공했다

     

    마침내 1950625일 새벽 4시 북한군 9만명이 150대의 소련제 탱크로 38도선을 넘어섬으로써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 물밀 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기에는 국군은 역부족이었다. 사흘만에 수도 서울은 점령되었다. 유엔은 전쟁이 시작된 다음날 긴급히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에 퇴각을 요구했다. 유엔은 북한의 공격이 계속되자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한 16개국 연합군대를 한국에 파견했다

     

    맥아더는 9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했다. 유엔군의 참여로 보급로를 차단당한 북한은 38도선까지 밀려갔다. 이때 유엔은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할 것인가. 이 상태로 휴전할 것인가로 고민했다. 마침내 101일 유엔군과 국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격해갔고 1019일 평양을 점령했다

     

    1951년 1.4 후퇴

    몹시도 추웠던 1950년 겨울에 중공군이 개입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다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어닥치자 무제한적 작전계획을 꺼렸던 트루먼 대통령은 후퇴를 명령했다. 195114일 국군은 후퇴하고 수도 서울은 다시 함락당했다. 그러나 일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서울을 다시 되찾고 국군은 38선을 다시 돌파했다. 한국전쟁이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국은 소련의 개입을 우려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만인 1951623일 소련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휴전협정을 제의했다. 이승만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8일 휴전협정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한국전은 그 뒤 2년 정도 계속되다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지켜주겠다는 보장을 이승만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19537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3년간의 소모적인 전쟁으로 인해 피해는 엄청났다. 5백만명 이상의 아까운 인명이 죽어갔고, 1천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가족과 헤어졌다. 그리고 전국 어딜 가나 부모 없는 고아들이 넘쳐흘렀다. 물질적 피해액은 30억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공업시설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동족 간의 비참한 상잔으로 이념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해방 이후 숙원이었던 민족통일은 더욱더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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