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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민주화 함성이 아직도 흐르른가 ?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3. 5. 18. 04:49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70년대와 80년대를 구분 짓는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은 1979년 10월 부마항쟁과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 항쟁이었다.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게 되는 이 두 항쟁이야말로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었다. 특히 80년대 서막을 알리는 광주민주항쟁은 박정희가 암살된 10.26사건 이후 등장한 신군부와 이에 저항하는 광주민중 사이에 벌어진 무력충돌이었다. 군사독재의 재편음모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이 활발했다. 게다가 광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원로 재야인사에서부터 학생운동권에 이르기까지 결속력이 매우 높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발표된 것을 전후로 점차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M16 대검

    5월 14일에서 16일 걸친 도청 분수대 앞 민주화 성회는 운집한 1.6만명의 시민들에게 깊은 감명과 민주화의 기대를 안겨준 대회였다.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이 가결되자 신군부는 전국의 대도시에 재빨리 군대를 투입했고 특히 서울과 광주에 핵심부대를 배치했다. 광주에는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가 파견되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앞에 2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비상계엄 해제와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향해 돌격하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무참히 얻어맞았다. 수많은 부상자들이 나왔고 군인들의 무차별 진압 소식을 들은 광주시민들은 흥분하여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공수부대는 M16소총에 대검을 꽂고 시민을 향해 달려가는 등 시내 도처에서 상상할 수 없는 만행들을 저질렀다.

     

    19일에도 이 같은 공수부대의 만행은 계속되었다. 이날부터 광주민중항쟁은 자발적인 대중투쟁에서 무장항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20일 오후 운수노동자들이 2백여대의 차를 몰고 금남로로 향해 차량시위를 벌이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시민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시위대에 가담했다. 21일 수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도청을 에워싸기 시작하자 공수부대는 겁을 먹기 시작했다. 많은 청년들이 차에 올라타 줄이어 도청으로 향했고 여성들은 시위대들이 먹을 밥을 만들어 실어날났다. 이날 오후 시위군중은 두명의 대표를 뽑아 도지사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것을 신호로 평화적 해결을 기대하는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금남로에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금남로는 금세 피로 물들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지켜본 광주시민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내 시위대들은 광주 부근에서 무기를 구해와 시민군을 조직 계엄군에 맞섰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공수부대는 도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승리를 기뻐하며 광주만세를 외쳤다. 오래간만에 평화를 되찾은 시민들은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무장해제에 관해서는 지도부의 의견이 나뉘어서 좀처럼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2,3차 시민궐기대회를 가지면서 투쟁적인 지도부가 도청 상황실을 장악하고 무장조직을 재편성하면서 결전의지를 다졌다. 

     

    신군부는 20일 오후 31사단장을 시위진압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박탈하고 특전사령관 정호용에게 실질적인 지휘권을 넘겼다. 게다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1일 수세에 처한 공수부대를 전술상 일단 외곽으로 뺴내고 20사단을 증파하여 23일 이후 광주시민을 소탕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26일 계엄군은 광주시내로 진입하는 도로를 봉쇄하고 2만 병력이 탱크를 몰고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27일 새벽 2시 항쟁지도부 본부에서 처절하고도 결연한 마지막 가두방송이 있었다 - 시민 여러분 !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 1시간 후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도청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던 젊은이들은 사라져갔다. 그리고 10일간의 광주민주화항쟁은 막을 내렸지만 이때부터 광주정신을 잇는 80녀대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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