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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우리의 영웅 안중근은 조선 독립을 울부짖었다
    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2. 12. 23. 03:59

    만주 하얼빈 역에서 그리 멀리 않은 채가구, 청년 안중근과 우덕순은 거사장소인 채가구역을 답사했다. 그러나 현지를 답사한 이들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만일 이토가 탄 열차가 채가구를 들르지 않고 그대로 하얼빈으로 향한다면 거사는 실패하고 말 것이 아닌가 !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에게 당신이 여기 남으시오. 나는 하얼빈으로 가겠소라 말했다. 19091026일 오전 10시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실은 특별열차가 예정보다 1시간 늦게 만주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기차의 연착으로 실망한 안중근은 기적소리를 듣고 급히 다시 역으로 달려갔다. 그는 일등 대합실을 통해 곧장 역구내로 달려들어갔다. 마침 이토는 러시아 의장대 앞을 지나고 있었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동지 우덕순이 지은 <원수가>를 되뇌이면서 안중근은 3발을 이토의 가슴에 나머지 3발은 수행하던 비서관, 영사, 만주철도 총재를 향해 쐈다. 그리고 우라 꼬레아! 비브라 꼬레아! 대한 만세!를 외치고 혁명가를 부르던 중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었다. 이토는 죽었는가 ? 이토는 죽었는가 ? 헌병의 대답은 죽었다였다.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30분 후에 절명했다

     

    조선 병합의 일등공신 이토를 죽인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질을 억제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重根이라고 했다는데, 어렸을 때 배와 가슴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이라 불리었다. 그의 부친은 박영효 등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일본 유학을 하기도 한 개화인이었다. 안의사는 어려서부터 유교경전과 조선역사를 공부하고 틈나는 대로 주위 산을 타면서 사격술을 익히는 등 호연지기를 길러나갔다.

     

    안 의사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시기인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을사 5조약이 체결되고 나라의 주권이 거의 상실되자 안중근은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1905년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운동을 벌였으나,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귀국했다. 이후 진남포로 이주하여 동생들과 토흥, 민흥, 국흥이라는 의미의 삼흥학교(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을 벌였다. 을사 5조약, 정미 7조약 그리고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어 가는 것을 지켜본 안중근은 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회의를 품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벌일 결심을 해서 결국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의 망명을 시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은 동의회를 조직하는 한편 의병부대를 창설하여 홍범도 부대와 함께 국내진압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1909년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약지를 자르는 斷指동맹을 맺어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그러던 중 이토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이토의 처단을 결심하고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191027일 여순에 있는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제1차 공판이 열렸다. 죄목은 안중근 살인, 우덕순은 살인예비였다.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 변호사 선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일본정부의 방침에 따라 변호인까지 일본인 관선변호사로 채워졌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행해졌다. 재판과정에 안중근은 한국의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토를 죽였음을 시종일관 주장했다. 이토를 죽인 것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오늘 이 법정에 끌려나온 것은 그 전쟁에 내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 심문받을 이유가 없다

     

    일주일 후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우덕순에게는 징역 2년을 언도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거사 이후 5개월 만인 191032610시에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일제는 처형에 앞서 두동생을 만나도록 허가했다. 순국 전날 안 의사는 먼저 수의로 쓸 한복을 가져왔냐고 동생들에게 물었다. 슬퍼하는 동생들을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하였다. 사람은 꼭 한번 죽는 법, 죽음을 두려워할 내가 아니다. 삶은 꿈과 같고 죽음은 잠드는 것과 같다. 조금도 어려운 일로 생각하지 마라. 현재 안 의사의 순국지인 여순감옥은 일제침략 죄상 폭로기념관으로 보존 공개되고 있다. 안 의사는 한국식 목관을 사용하여 매장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한편으로 교수형이 아닌 찜통에 쪄서 죽였다는 이설이 구전되어 전해진다

     

    < 안 의사의 총에 남은 총알 하나에 감탄한 남만철 이사 다나카 >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를 겨냥했던 총은 브라우닝 8연발 권총으로 이날 안 의사는 7발을 쐈을 뿐 1발은 사용하지 않았다. 7발 중 3발은 이토를 명중시켰고, 나머지 3발은 이토 옆에 서 있는 가와카미 하얼빈 총영사, 궁내대신 비서관, 다나카 남만주철도 이사를 각각 맞혔고 한발만 빗나갔다. 안 의사는 바로 현장에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는데 의사의 총에는 총알 한발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려는 달려드는 일본헌병을 쏠 수도 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순순히 체포되었다.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는 당시 총알이 구두 뒷굽에 박히는 바람에 다치지는 않았다. 그는 회고하기를 나는 내가 총에 맞았는지도 몰랐다. 총성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안중근이 늠름한 자세로 서 있어 나는 그의 의연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총 한발을 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안의 인격이 발사되지 않은 총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비서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일본인이 아닌 안중근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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