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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의 완성을 위해 어떤 과정을 가졌나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12. 8. 04:07
독일은 중세 이래로 신성 로마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서유럽에서 가자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크고 작은 연방국가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고 19세에 이르러서도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 내부에서는 활발하게 독일 통일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결과 독일 통일의 앞날에 두 개의 길이 열렸다. 그 하나는 소독일주의로서 다수의 다른 민족, 곧 슬라브인과 마자르인 및 이탈리아인 등을 포함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북독일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순수한 독일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를 주체로 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전 영토를 통합하는 이른바 대독일주의를 구현하는 길이었다
1861년 빌헬름 1세(1861-1888년)가 프로이센 왕위에 오르면서 적극적으로 독일 통일 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다음해에 비스마르크(1815-1898)를 수상으로 등용하고 몰트케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였다. 빌헤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대립하고 있을 때 비스마르크는 의회에 출석하여 군비확장없이는 독일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른바 철혈 연설이다. “독일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실력입니다..당면한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은 과오로 쇠와 피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수상에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즉시 군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의회의 기능을 4년 동안 정지시키고,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그의 노골적인 오스트리아 배척 정책과 철혈정책은 오스트리아 및 남독일 연방을 크게 자극하여 충돌은 시간문제이었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전쟁에 돌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개전에 앞서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우선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 영토인 베네치아의 점령을 인정하여 공수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는 라인강 왼편 땅의 병합을 묵인하기로 약속했으며, 러시아에 대해서는 폴란드 문제에 협력하기로 약속하는 것으로 주변 정지 작업을 완벽하게 끝냈다
프로이센군은 주위 국가들이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참모총장 몰트케의 뛰어난 작전에 의해 오스트리아를 돕고 있는 남북 독일 연방들을 정복하고 주력부대로 쾨니히그뢰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거의 전부를 섬멸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개전해서 겨우 7주간을 버티다 프로이센에 항복하였다하여 7주 전쟁이라고 한다. 7주전쟁의 결과 프라하 강화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탈퇴했고 대신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다음해인 1867년에 프로이센은 북독일의 하노버와 그 근방 지역을 병합하였다. 이러하여 독일의 통일은 그 반이 달성되었다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두터운 우의를 과시했던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1870년에는 서로 적이 되어 전쟁을 하였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통일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다시 공격하려 하자, 독일이 더 이상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 나폴레옹 3세가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선전포고를 한쪽은 프랑스였다. 1870년 7월 시작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은 외교 공작과 군비에서 뒤떨어진 프랑스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871년에 파리는 함락되고 말았다. 이전쟁 결과 베르사유 가조약에서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 지역을 할양하고 보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기로 약속하였다.
파리 입성에 앞서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연방 군주는 만장일치로 프로이센 왕 빌헤름 1세를 독일 제국 황제초 추대했고, 이로써 19세기 최대 현안 독일 통일이 완성되고 여기서 오스트리아는 제외되었다. 같은해에 독일 제국 새 헌법이 개정되었고, 통일의 공로자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 제1대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입헌군주제는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겉보기만의 입헌군주제이다. 황제가 원수로서 독재적 대권을 장악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을 타도하기 위해 해방전쟁에 종군한 독일의 젊은 학생들 속에 통일 독일을 조국으로 그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검은색과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를 통일 깃발로 하여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게다가 산업의 발달과 사회의 발전에 부응하여 국민 전체가 통일을 원하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이다. 그 결과 독일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생활 습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려 하는 것을 내셔널리즘이라 한다. 독일 통일 이후로 내셔널리즘은 세계 각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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