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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5차례의 중동전쟁으로 지형적 변화는 어떠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11. 25. 04:42
서기 70년 이래로 조국을 잃게 된 유대민족은 이스라엘 옛 고국에 국가를 세우는 것을 소원했다. 19세기말부터 시오니즘(이스라엘 회복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온 유대인은 제1차 대전중 영국 외상 밸포어가 유대인의 전쟁 협력을 구하기 위해 밸포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더욱 활발하게 건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1차 대전이 끝나면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7세기 이래로 아랍인의 거주지가 되었고, 예루살렘을 두고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2차 대전 동안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는 더욱 많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인과 유대인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중동으로의 진출을 서두르고 있던 미국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제출했고, 유엔 총회는 1947년에 이를 가결하였다. 이안은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과 유대인으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 아래 둔다는 내용이었다. 유대인 측은 이 안을 수락했으나 아랍측은 거부하였다
1948년 위임 통치기간이 끝나 영국군이 철수하자 유대인은 이스라엘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아랍 측 국가들, 즉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 5개국은 공동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팔레스타인 전쟁 또는 제1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의 무기원조를 받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의 승리로 영토를 넓히게 된 이스라엘은 아랍인의 도시와 마을 388곳을 약탈하였다. 이 약탈로 100만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1300년 동안 살아오던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으로서 주변 아랍 여러나라에 흩어져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아랍 여러 민족 사이에는 뒤탈이 생겼다. 전쟁의 패인이 아랍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봉건적 체제 때문이라고 보고, 이를 타도하여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1936년 이래 영국과 이집트의 조약에 따른 영국군의 수에즈 운하 지대 주둔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1952년 청년 장교가 지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이집트 혁명) 영국군을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시키고 1956년 나세르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나세르 대통령에 취임하자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수에즈 운하의 경영권을 소유한 영국과 프랑스 및 이스라엘은 즉시 군사를 보내 공격하였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이다. 그러나 국제 여론이 이집트 편으로 기울자 곧 휴전이 성립되고 이로써 이집트에 의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는 이루어졌다
그 후도 이스라엘은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의 원조를 받아 빠르게 국가 건설을 추진하다가 1967년에는 아랍 연합과 요르단 등에 선제공격을 하였다. 이스라엘을 불과 6일 동안에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강 서쪽에 위치한 가자지구 등을 점령하여 지난날에 국토에 비해 두배가 넘는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중동에서 벌어진 아랍제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세 번째 전쟁이었기 때문에 제3차 중동전쟁이라 일컫는다. 이 3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난민은 150만명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해 모든 점령지로부터 철수하도록 결의했으나 이스라엘은 그 결의를 거부하였다. 한편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자결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1963년에 결성되어 이스라엘에 대해 치열한 게릴라전을 펴기에 이르렀다
1973년, 아랍측은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격전을 치러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 점령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 지대를 탈환하였다. 이것이 제4차 중동전쟁이다. 아랍 여러나라들은 원군을 파병하는 동시에 아랍 석유수출국기구 총회를 열어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였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영국, 서독 등에 대해 석유 수출을 금지하고, 기타 국가에는 수출을 삭감하는 석유 전략을 채용하였다. 그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나, 곧 미국과 소련 양국의 조정에 의해 정전이 실현되었다. 이 사태를 계기로 유엔은 개발 도상국가의 입장도 고려한 새 국제 경제질서의 확립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민족 자결권을 승인함과 동시에 PLO를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하고 정당한 대표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은 아랍 여러 나라들의 대립을 틈타서 1976년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여 PLO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사이 나세르의 뒤를 이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재개함과 동시에 대결노선을 폐기하고 이스라엘과 대화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1979년에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군의 시나이 반도로부터의 철수 등을 포함한 평화조약을 미국의 중개 아래 조인하였다
그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어 1982년에는 제5차 중동전쟁이라고도 일컫는 레바논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레바논이 팔레스타인 게릴라의기지가 되어 있다고 해서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이 때문에 PLO는 베이루트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 종결이라는 국제정세의 큰 전환기를 맞아 국제 여론은 중동 평화에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1991년에는 마드리드에서 중동평화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첫째로 이스라엘은 점령지로부터 철수 할 것 둘째는 교전상태를 중단할 것 셋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승인할 것 등 세가지였다. 이스라엘은 이 결의안을 거부했을뿐 아니라 최대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쪽지역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점령지를 이스라엘 영토로 기정사실화하는 정책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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