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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품 안에 넣기 위한 러시아 개혁 군주인 표트르 1세는 어떤 정책을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11. 20. 02:47
<이복누이인 소피아와 권력다툼과 어린시절 근대화에 눈뜬>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와 두 번째 황후 나탈리아 키릴로브나의 아들로 1672년에 태어났다. 표트르가 4살 때에 알렉세이 황제가 승하하자 이복형 표도르 3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표도르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6년만에 저승으로 갔다. 이에 표도트 1세가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이복누나 소피아가 스트렐치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어 일단 이복형 이반 5세와 표트르가 공동황제가 오르고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소피아의 눈을 피하기 위해 표트르의 어머니는 표트르를 시골 마을로 보내서 키우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이 러시아에 일하러 온 유럽 상인들과 기술자들의 정착촌과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표트르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당시의 최신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 등이었고 귀족 자제들을 모아 놀이 군대를 편성하여 실전처럼 전투를 벌여 20명이 살상하기도 하였다. 1683년 놀이 군대는 러시아 최초의 근대식 부대이자 황실 친위대로 발전하고 소피아 반란 진압이나 훗날의 대북방전쟁 등지에 투입되었다. 한편 1689년 이복 누나 수피아의 반란을 표트르는 진압하고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었다.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황제가 직접 결정하지 않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의 권한으로 체결하여 무효라는 입장이었다. 이반이 1696년에 죽자 그때부터 표르트는 단독 황제로 러시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1698년 오스만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서유럽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서유럽에서 기술이나 사회정책도 배워오라는 뜻으로 젊은 귀족들도 대거 포함시켰는데 표트르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참여했다. 프로이센에서는 대포 조작 기술을 배웠고, 네덜란드 조선소에서는 손수 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수학, 기하학을 배우고 심지어 의학과 해부학도 배웠다. 그런데 사절단이건 방문한 나라 사람들이건 표트르 신분을 알았다고 한다. 일단 키가 장신수준이 아니라 2미터를 넘어 거인 수준이라 눈에 띄였다. 방문 군주들은 호위를 겹겹이 하면서 대우를 해주었으나 워낙 악동이라 자기 나라에 오지 않았으면 했다고 한다. 한편 유학 중간에도 소피아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급히 귀국해서 손수 처리했다고 한다
<스웨덴과 대북방전쟁으로 발트 지역을 얻었는데>
스웨덴에는 1697년 새로이 16살의 칼 12세가 즉위했다. 당시 팽창중이던 스웨덴과의 대립은 21년간의 대북방전쟁을 시작했다. 1700년 러시아군은 나르바 전투에서 패하였다. 스웨덴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햇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했다. 거기다가 눈보라가 스웨덴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불자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러시아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고 패주하던 러시아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러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대참패를 당했다. 그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 교회의 종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이후 폴란드 연합군과의 작전으로 벌어진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칼 12세는 퇴로마저 끊겨서 오스만제국으로 망명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표트르 대제는 1710년 무리하게 몰다비아 원정을 계획하다가 프루트 전투에서 오스만제국에 패하였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은 아조프를 되찾는데 만족하고 대북방전쟁에서 빠지자 표트르는 연합군과 스웨덴을 밀어붙여 발트해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근대적 관료체제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등 서구화 개혁을>
1722년에는 14관등 제도를 만들어 러시아에 근대적 관료체제를 정립했다. 또 표트르 1세는 귀족들의 몽골식 긴 수염을 자르고 수염을 기르고 싶어하는 사람은 수염세를 물렸다. 반면 서유럽에서 보편화된 콧수염은 오히려 장려했다. 1703년부터 표트르 1세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712년에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도시가 되는데, 이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이 지역은 춥고 습한 지역이라 건설이 어려워 3만명의 농민들을 강제노동을 시켜 많은 사람이 희생하면서 세웠다고 하여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하기도 한다. 1721년에는 표트르 1세는 스웨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족들로부터 전 러시아의 황제 칭호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옛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유럽의 나라들이 승인해 주었다. 한편 포트르 대제는 황태자 알렉세이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아버지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또한 하녀 출신과 놀아나면서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과 함께 정부와 오스트리아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체포하여 법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그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러시아의 개혁 군주인 표트르 대제에 대한 평가는>
러시아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러시아인들의 제 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표트르가 도입한 것들이다. 또한 대륙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조선소를 건설했으며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표트르 대제 이후를 근대로 불리게 되어 역사상 큰 변혁을 가져왔다고 본다.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나 차르라는 하는 슬라브 왕정일 뿐 다른 국가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교역량도 수십배로 늘어났고 유럽에서도 표트르 대제를 인정하여 당당하게 유럽대륙에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표트르 시대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을 하였고 근대화 정책을 하려고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했다. 한편 농노제를 개편하지 못하였다는데 한계가 있다. 물론 귀족들의 서구화 정책에 거부감을 가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조치였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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