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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반도에서 투르크 세력 악화에 따른 범슬라브족과 범게르만족의 충돌로 되었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11. 2. 05:01
발칸반도에서 헝가리, 보헤미아, 폴란드에 이르는 동구 일대의 지역은 게르만과 슬라브 및 아시아계 민족의 접촉점으로서 무척 복잡한 민족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19세기 이래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영국 등 열강의 진출목표가 되어 왔었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발전되면서 국가관계의 불안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투르크 제국의 쇠약으로 발단된 발칸 문제는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1878년 베를린 회의 아래로 러시아을 중심으로 범슬라브주의 세력과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 세력은 발칸에서 충돌하여 죽음의 십자가를 그려내고 있었다. 이것이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투르크에서는 청년 투르크당이 영국과 프랑스 후원 아래 1908년 혁명을 일으켜 입헌정치를 수립하여 지도권을 쥐고 민족주의와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이 혁명은 발칸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투르크의 외교정책에서는 지금까지의 친독일 정책이 대신 3국 협상으로 접근할 조짐을 보였고,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관리 아래 있는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 2주의 주민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독일은 발칸에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1909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의 병합을 선언하게 하였다. 이것은 범슬라브주의에 큰 타격이었다. 원래 2주의 주민은 슬라브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세르비아는 일찍부터 대슬라브주의를 주창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이 2개주 및 알바니아주를 합병하여 아드리아해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한편 이탈리아는 1861년의 통일이후 자본주의의 발전과 인구 증가에 떠밀려 아프리카에 식민을 계획하고 있었다. 때마침 투르크 제국의 혁명이 터지게 되자 2차 모로코 사건으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국제관계가 긴장된 기회를 이용하여 1911년 갑자기 아프리카 북해안의 투르크 영토인 트리폴리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탈리아와 투르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투르크는 해전과 육상전 모두에서 패해 1912년 로잔 평화 조약에서 트리폴리와 리비아를 떼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쟁을 통해 혁신 투르크도 역시 약체라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베를린회의에서 열국이 합의한 투르크 영토 보전의 원칙이 휴지가 되었으며, 발칸 여러나라들이 동맹하여 투르크 영토의 분할을 획책함에 따라 제1차 및 제2차 발칸 전쟁(1912-1913)이 시작되었다. 두차례의 걸친 발칸 전쟁의 결과 투르크는 수도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영토 거의 대부분을 잃었다. 이 전쟁에 의해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것이 세계 1차 대전의 발생원인이 되었다
20세기 초의 발칸반도는 화약고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이곳의 영토문제로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그리스, 투르크 등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화약고에 불을 댕겨 유럽 전국을 전쟁에 휘말려들게 한 것은 19세의 청년이 발사한 두발의 총알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열린 육군 대훈련을 열병하였다. 그 행사를 끝내고 황태자는 예정을 변경하여, 그날 오전에 있었던 폭탄 테러로 부상당한 수행원들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전수는 길을 잘못 들었다. 운전수가 방향을 바꾸려고 오픈 카를 정지시킨 순간 거리 모퉁이에 있던 사람이 권총이 황태자 부부를 향해 두발을 발사했다. 대공비는 남편의 품에 쓰러졌다. 황태자는 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차 안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그날은 기이하게도 황태자 부부의 14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범인은 19세 학생 가브리엘로 프린치프였다. 그는 비밀 결사 ‘결합이냐 죽음이냐’가 보낸 암살자 7명 중 한명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세르비아인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세르비아인들을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황태자는 둘도 없는 공격 대상이었다. 이것이 비극의 사라예보 사건이다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에 대해 최후통첩을 하였다. 황태자 살해 사건의 책임은 세르비아 정부에 있으니 정도에 따른 책임을 질 것과 세르비아 국내에서의 반오스트리아 시위운동을 즉시 중단할 것 등이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하였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하였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 및 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하였다. 당시 독일의 최대의 적은 러시아였기 때문에 러시아와 우호정책을 펴고 있는 프랑스와 싸우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도 이 전쟁을 지금까지 프랑스에게 당해온 굴욕을 설욕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독일은 동쪽의 러시아와 서쪽의 프랑스 양쪽을 적으로 두고 싸웠기 때문에 하루빨리 결판을 내야 하였다. 빨리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벨기에의 영토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택해야 하였다. 벨기에는 엄정중립을 내세웠다. 그러나 독일군의 침략을 받게 되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독일군은 사정거리가 14km인 당시에는 최신무기인 거포를 쏘아댔다. 벨기에에 군의 진지를 침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17년경 되자 독일은 물자가 동났고, 그해 4월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전국은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전투마다 밀리게 된 독일은 황제 빌헬름 2세의 네덜란드 망명을 계기로 1918년 11월 11일 연합군 측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인류는 이 5년간의 전쟁에서 1천만명이 넘는 고귀한 생명을 잃었고, 그중 6백만이 민간인이었다. 2100만명이 부상당했으며 750만명이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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