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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한 카이사르는 어떻게 몰락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10. 9. 04:21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세기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 서부를 정복한 로마 장군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이끌던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위협을 느꼈고, 그의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명령을 거부했고, 그는 로마로 진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주피터 신전까지 진격했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유럽까지 적을 쫓았고 결국에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한 이집트까지 갔다. 이집트를 떠나오기 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여왕으로 세웠다. 이집트를 떠나오기 전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어 로마를 통치했다. 카이사르는 절친한 브루투스가 가담한 음모로 기원전 44년에 암살당했다
카이사르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20대에 그는 동지중해에서 해적에게 붙잡힌 적이 있다. 몸값을 내어주고 풀려나온 카이사르는 지역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군대를 양성했고 해적의 위치를 찾아내어 모두 처형했다. 수년 후 카이사르가 로마 정치권력의 사다리를 한참 올라가던 기원전 62년 추문 하나가 터졌다.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남성 출입이 금지된 종교의식에 참가한 것이 밝혀졌다. 그 의식은 카이사르의 집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가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이사르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직접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아내와 가족이 의심조차도 받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이 한창일 때 원로원에 의해 독재관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재관에게 비상통치권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비상상황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공화정은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의 지위에서 로마를 통치했지만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상의하고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유지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최후를 맞이하기 몇 년전부터 그는 점점 부주의했다. 아시아 속주 시민들이 그를 신격화하는 것을 내버려 뒀고, 심지어 그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이 주조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인물이 그런 명예를 누린 예가 없을 정도였다. 동전에는 종신 독재관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렇게 불필요한 영광은 카이사르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했고 결국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아시아에서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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