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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광기 문화대혁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1966-69년)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9. 10. 05:19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요문원의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1959년 북경시 부시장인 오함은 <인민일보>해서, 황제를 꾸짖다라는 비유적인 수필을 발표한 후 곧이어 해서파관이라는 극본을 써서 1961년 베이징에서 공연하였다. 명나라 관리인 해서는당신은 너무 독단적입니다. 당신은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고 비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온 나라 사람들이 당신에게 불만을 품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읊조린다. 팽덕회가 떠올려지는 장면이며, 그를 파면한 황제는 모택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일 것이다. 첫 공연 당시에 모택동도 해서의 자세를 배워야한다고 했던

     

    이 공연이 새삼스레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당시 당권에서 비켜서 있으나 당 외의 대중들에게 엄청난 카리스마를 갖고 있던 모택동은 당권을 가지고 있던 류소기 등 온건세력을반혁명 수정주의 세력’‘우리 곁에 잠자고 있는 흐루시초프와 같은 인물’‘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인민공사를 파괴하고 지주와 부농의 지배를 재건하려는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그 대중이란 청소년이었고 노동자였고 군대였다. 대중을 동원하여 정상적인 절차를 배제하고 이루어진 당권경쟁은 중국을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질서의 파국으로 이끌었다. 폭력은 반대세력의 또 다른 폭력을 불러와 중국은 내전의 상황에 돌입하였다. 합법적인 권력기구들이 무력화되면서 무정부상태가 되고 일반 범죄까지 가중되는 폭력적인 광기가 중국사회를 휩쓸었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본디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모택동에 대한 개인적인 숭배를 조장하는 세력들과 당권을 되찾아 혁명의 원칙을 지켜내고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모택동의 조급하고 유토피아적인 의지가 결합되어 나타났다. 무산계급인 인민으로부터 임의로 그들의 적으로 규정된 무수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계급의 적으로 몰린 수 많은 과거의 혁명영웅, 전문가, 학자, 민주인사와 군중이 수시로 학대와 고문 등으로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정치혁명이나 경제혁명과 달리 문화혁명은 인간의 인식을 개조하여 혁명을 완성한다는 것이기에 더욱 자의적이고 근본적이며 과격한 형식을 띄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전조로 1962년부터 시작된 사회교육 운동이 있었다. 대중에 의한 당의 통제, 위계질서의 제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결합, 새로운 인간과 혁명사업 계승자의 육성 등의 과제는 그대로 문화혁명의 지향점이었다. 사회교육 운동은 실패했으나 인민혁명군 내에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모택동은 당은 수정주의자가 되었지만 군은 혁명의 순수성을 보존하여 연안 정신을 다시 소생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모택동의 호소에 맨 처음 귀를 기울인 것은 북경의 대학생들이었다. 젊은 철학 교수인 섭원제는 대자보를 통해 북경대학장을 비판했다. 모택동은 그 교수를 지지하고 완전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권력의 출현을 선언했다. 대중 동원이 대학과 중고등학교로 급속히 확산되었다.‘파괴없이는 건설도 없다’‘모든 악귀를 쓸어버리자는 구호가 울려 퍼지며 학교에서 만들어진 급진적 그룹들로부터 이른바 홍위병이 탄생한 것이다. 홍위병은 대부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다. 이들은 낡은 기존의 사회를 타파하고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하는 문화대혁명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자신이 직접 쓴사령부를 폭격하라는 대자보 통해 홍위병에게 당에 대한 투쟁을 위임하고 임표와 인민해방군에게 젊은 반란파가 조직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홍위병 단체들이 부르주아 질서의 대표자들에게 테러를 가할 수 있도록 허용된 자유가 급속도로 경쟁 파벌들과 폭력집단들 사이의 충돌로 나아갔다. 수천만에 이르는 수도의 홍위병들이 지방으로 보내져 지방 대중들의 반란파들을 도왔다. 이러한 대규모 이동을 모택동파는 대장정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수백만의 청소년들은 이를 통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고 인민해방군 부대가 그들에게 숙소와 음식을 제공했다.

     

    1967년 모택동과 문화혁명 소조는 혁명 권력을 장악했다. 그동안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던 인민해방군이 새로운 권력구조, 즉 혁명위원회의 수립을 위해 동원되었다. 1966년 인민해방군의 혁명 개입을 분명히 반대했던 주덕 원수는 홍위병들에게 난폭하게 공격당하였다. 당 중앙은 1967년 중앙이 직접 통제하는 군단들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역군을 감시하였다. 1966년에는 홍위병은 순진한 청년이 아닌 숙청과 체포, 투쟁의 시련을 거쳐 그들 스스로 무장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에는 전국에 걸쳐 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969년 새로이 소집된 9차 전국대표대회 대표의 절반은 인민해방군이 차지했고 임표는 주석의 후계자가 되었다. 혁명을 통해 민주적인 새로운 권력기구가 창출되기보다 군인이 민간 간부를 대신하게 되었고 파괴되었던 옛기구들이 다시 살아났다. 혁명의 후계자가 아닌 희망을 걸 수 없는 홍위병을 양산했다.

     

    1968년 모택동은 그대들은 나를 실망시켰을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으로서 중국의 전사들을 실망시켰다는 말을 시작으로 홍위병들을 진압했다. 홍위병들과 혁명 반란파들은 내부 조직 구조의 약화, 중앙의 지지철회, 군대의 진압으로 사라져 갔다. 체포와 학살을 면한 홍위병들은 인민해방군에 입대하거나 농촌으로 내려갔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약 2천만명의 젊은이들이 내려갔다. 그래서 홍위병이 사라졌다. 문화대혁명은 증오와 복수심을 짙게 남겼고 다양한 집단들 사이에 씻어내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각 파벌은 백화제방과 대약진 시기의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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