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대경에 지주계급과 부르조아의 곡물조례법을 둘러싼 한판 승부가 있는데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1. 9. 24. 04:08
정치는 대체로 경제보다 뒤늦게 변화한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정치권력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으로 등장한 신흥계급이 정치세력을 구축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00년을 전후한 영국이 바로 이런 상황이다. 영국의회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계급인 귀족이 장악한 반면, 새롭게 부를 축척한 신흥 자본가 계급 부르주아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제3계급인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데 급급해 아직 계급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때 최대 이슈가 된 것이 바로 곡물 수입금지를 겨냥한 곡물조례였다. 곡물조례는 본래 영국이 곡물의 수입물량 조정을 위해 제정한 법령을 가리켰다. 중상주의 시대인 1660년 이래 영국에서는 곡물의 국내 가격이 낮을 때는 수입관세를 높게, 가격이 높을 때는 관세를 낮게 매겨 소비자 가격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1815년 밀 가격이 급락하자 토지 귀족이 장악한 의회는 밀 가격을 높게 유지하려고 곡물조례를 개정했다. 밀 수입을 금지하는 가격 기준이 종전 쿼터당 54실링 이하에서 80실링 이하로 높아졌다. 밀 가격이 높아야 증산을 자극한다는 왜곡된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급진전하면서 곡물 생산자는 줄어든 반면 인구 증가로 곡물 소비자는 급속히 늘어나 수요 초과 상태였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1812년에는 밀가격이 폭등했다. 밀을 28kg를 사는데 노동자의 보름치 봉급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1813년 풍작과 1814년 대륙봉쇄령 해제로 프랑스와 우크라이나 등지의 저렴한 밀이 수입되어 1815년에는 영국의 밀 가격은 급락했다. 대륙봉쇄령 기간 중 고수익을 올리던 지주들은 높은 가격을 계속 유지하려 했고, 공장을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밀 가격이 뛰면 덩달아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줘야 했기에 강하게 반대했다. 더구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제대 군인들이 대거 노동자로 유입되어 임금이 하락할 상황이었는데 곡물 가격만 천정부지여서 노동자들만 골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곡물조례 논쟁은 밀 가격이 높아야 이익인 지주계급과 가격이 낮아야 이익인 신흥 자본가 계급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노동자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이때 곡물조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 경제학자가 데이비드 리카도였다. 토지 귀족들은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가 높아 곡물을 수입해도 가격이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곡물가격이 빅싸면 농업으로 이익을 보려는 사람이 늘어나 지대가 높아지게 되어 곡물가격을 더 밀어 올린다며 거꾸로 반박했다. 이것이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이다. 차액지대론은 토지의 지대가 높아질수록 지주 계급이 토지의 모든 이윤을 독차지해 산업자본이 형성될 수 없고 경제발전과 분배도 어렵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리카도는 곡물을 수입해 가격을 낮추면 지대도 하락시킬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 자유무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자본가와 노동자를 괴롭힌 곡물조례는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100만명이 넘게 굶어 죽은 1846년에야 폐지되었다. 영국 상품을 실어나를 때는 자국과 식민지의 선박만 이용케 하는 항해조례도 1849년 사라졌다. 곡물조례와 항해조례의 폐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아들을 위한 인문학 >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대왕정을 위한 경제체제인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대립 상황은 어땠나 (0) 2021.11.30 은행은 4천년전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 신전의 탁자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0) 2021.10.29 18세기 말에 낙관주의 경제관에 찬물을 끼얹은 인구론을 쓴 맬서스의 함정이란 ? (0) 2021.07.27 경제대공황은 뉴딜정책의 결과라기보다 통화량 증가 효과와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벗어났다고 하기도 하는데 (0) 2021.07.07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은 어떤 배경에서 나왔나 (0) 2021.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