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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을 위한 경제체제인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대립 상황은 어땠나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1. 11. 30. 04:10
15-17세기 대항해 시대의 정치체제는 왕권이 강력한 절대 왕정이었다. 짐은 곧 국가다 라는 루이 14세의 말은 절대왕정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의 절대왕정은 왕의 권력은 신에게 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지배이념으로 삼고 왕에게 복종하는 관료와 강력한 상비군으로 유지되었다. 중세는 봉건영주의 자급자족 시대여서 왕권이 미약했고,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1337-1453년)이 116년을 끈 것은 군대가 1년에 4개월만 복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왕정 시대의 군대는 쉬엄쉬엄 싸우는 군대가 아니었다. 항시 전쟁에 대비해 명령만 내리면 출동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을 갖춘 상비군이었다. 직업군인도 생겨났다.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시민계급은 봉건영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 왕은 통치자금이 필요했다. 통치자금은 세금과 해외무역에서 나왔다. 절대왕정 시대에 각국이 앞다퉈 해외무역을 주도하고 소금세, 창문세 등 온갖 명목의 세금을 걷은 이유다. 또한 국가가 수출 독점권이나 사치품 공급, 소금 채취권, 화약 독점생산 등의 특권사업을 팔아 수입을 올리는 것도 흔했다. 관료들은 세금 징수오 특권사업 등으로 왕실 재정을 키우는 게 주된 임무였다. 해외무역으로 국부를 쌓으려면 해양 패권을 차지하고 더 넓은 식민지와 무역거래선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다. 식민지는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시장이며 금광, 은광 등으로 국부를 늘려주는 노다지였다. 식민지 확보는 곧 국가가 하는 정복과 약탈을 의미했다. 이를 합리화하는 경제사상이 바로 중상주의다. 중상주의는 16세기 유럽의 팽창주의를 뒷받침하는 경제정책이다
중상주의는 한마디로 화폐가 국부이고 금은이 많을수록 부강한 나라라는 사고방식이다. 나라에서 금은이 빠져나가는 것은 국부를 잃는 것으로 간주했다. 총량이 한정된 금은은 더 많이 차지하지 못하면 뺏기는 제로섬 게임으로 여긴 것이다. 이럴 경우 최대한 많이 수출하고 적게 수입해 무역수지 흑자를 극대화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된다.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물리는 것도 기본이다. 그 결과 제각기 수출시장을 넓히고 값싼 원료를 확보하려다 충돌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17-18세기는 전쟁의 시대라고 할 만큼 유럽 각국이 수시로 패를 갈라 싸웠다. 그 배경에 중상주의에 입각한 경제 패권이 도사리고 있었다. 중상주의는 체계적인 학설이 아니다. 중상주의라는 명칭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금은이 국부라는 사고방식을 강력한 비판하면서 붙인 것이다
국민의 90%가 농업에 종사했던 프랑스는 농산물 수출이 어려워지자 그 피해가 특히 심했다. 프랑스의 중농주의는 국민 대다수인 농민의 희생을 초래한 콜베르의 중상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중농주의는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땀 흘려 일하는 농업만이 유일한 생산적 산업이며 부의 원천이라고 보는 사상이다. 생산물에서 비용을 뺀 순생산물은 오직 농업 생산에서만 생기며, 농업 순생산물을 늘리는 것이 진정한 국부의 증가라는 것이다. 반면 상공업은 농업을 통한 생산물을 가공해 공산물로 형태만 바뀐 것이므로 국부의 증가가 없다고 봤다. 대표적인 중농주의자인 프랑수아 케네는 영세농민이 농산물로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적정가격을 보장해 농업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국가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곡물 수출 자유, 가격통제 철폐 등 자유방임 정책이 필요하고 세금은 수입 농산물에만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금세와 인두세 등 최악의 조세제도로 인해 고통받는 농민을 고려해 다른 세금을 철페하고 지주에게만 물리는 토지 단일세도 도입하자고 건의했다. 루이 16세때 재무장관이 된 튀르고도 중농주의 정책을 토대로 길드 폐지 등 자유주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귀족, 길드 등 특권층의 반대로 실패했다
개인이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는 기독교 윤리가 지배한 중세처럼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윤 추구를 악덕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처럼 19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교회 목사들은 개인의 부를 위한 이윤 추구는 탐욕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중상주의는 국가의 부를 위한 통치사상이었지 개인의 이윤 추구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에 정착한 의사 버나드 맨더빌이 쓴 시 한편이 이런 분위기를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를 통해 사치와 낭비가 죄악의 근원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번영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상공업으로 성공한 신흥 부르주아에게는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맨더빌은 사치는 가난뱅이 100만명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얄미운 오만은 또 다른 100만명을 먹여 살렸다라고 썼다. 개인의 악덕이 사회의 미덕이 되고 개인의 탐욕이 사회 번영을 이끈다는 주장이다. 금욕과 이타심을 미덕으로 삼는 기독교 윤리가 오히려 위선이며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애덤 스미스와 케인즈의 유효수요론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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