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경제대공황은 뉴딜정책의 결과라기보다 통화량 증가 효과와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벗어났다고 하기도 하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1. 7. 7. 04:57

    경제대공황이 수렁에 빠져들 듯 점점 더 악화된 것은 생산과잉으로 재고가 남아도는데 물건을 사줄 수요가 턱없이 부족한데 원인이 있었다. 주택과 주식시장이 무너져 도시민, 농민 가릴 것 없이 몰락했다. 더구나 각국이 자기만 살겠다고 너도나도 보호무역의 담을 높여 해외 수요마저 급격히 줄었다. 공급과잉이 수요부족을 낳고, 수요 감소가 공급 과잉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었다. 공장과 상점에는 안 팔린 상품이 잔뜩 쌓였는데,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다. 농장에서는 남아 도는 오렌지를 땅에 묻느라 고생하고 농장 밖에서는 오렌지를 훔치다 경비원의 총에 맞는 사건도 벌어졌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자생적인 회복을 기대하기에는 사정이 너무 다급했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고전주의 자본주의 원칙을 깨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대공황을 탈출하기 위해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정부의 섣부른 개입, 방향 착오, 무리한 간섭은 대공황이라는 병을 더욱 키웠다. 후버 대통령은 노동자의 임금을 내리지 못하도록 기업과 은행에 압력을 넣었다. 또 불황을 타개한다는 명분으로 1930녀에 수입관세율을 400%까지 올릴 수 있는 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물가하락에도 임금이 안 내려가자 실업자가 더욱 늘어났다. 미국이 수입 관세율을 인상하자 유럽국가들도 경쟁적으로 관세율을 높여 국제무역이 3년간 63%나 급감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1933년에 취임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 경제학자 케인스의 의견을 수용해 5년간 걸친 뉴딜정책을 폈다. 케인스는 총수요를 늘리기 위해 정부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딜은 카드게임에서 패를 새로 돌리는 것을 가르킨다. 경제정책을 확 바꾼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다. 거의 사회주의에 가까운 조치들을 대거 시행하는 것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총수요 증가를 위해 테네시 강 전력종합개발을 비롯해 황무지 개간, 도로 건설 등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 실업자 구제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노사 임금협상에도 정부가 개입해 노조의 협상력을 높여주었다. 그리고 최저임금제도 도입했다. 아울러 부실 은행을 정리하고 증권시장의 규제와 감시를 강화했다. 국민 사기 진작을 위해 말썽 많은 금주법을 폐지했다. 뉴딜정책이 시작된 1933년 기점으로 미국경제는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1942년에는 국민소득이 대공황 이전 수준으로 올라왔다. 때문에 대중들은 뉴딜정책이 대공황을 탈출했다고 인식했다. 뉴딜정책이 오히려 시장에 개입해 경기회복을 지연했다는 반론이 우세하다. 실제로 실업률은 1940년대까지 여전히 10%를 웃돌았고 잦은 파업과 태업, 공장점거 등으로 생산성이 떨어졌다. 한편 금이 유입되어 통화량이 늘고 유럽의 정세불안으로 이탈한 자금이 미국에 투자된 효과가 뉴딜정책보다 훨씬 컸다고 보고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이 대공황의 종식했다는 주장이 있다. 전쟁중에 실업률이 한자리 수로 뚝 떨어졌고 미국 경제가 8% 이상 성장했다는 점이 근거이다. 그러나 실상은 미국의 생산인력의 20%의 달하는 1200만명을 군대로 징집되고 경제성장률이 높아진 것도 무기 등 군수물품 생산 등 정부지출이 늘었을뿐 민간소비와 투자는 오히려 감소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경제대공황은 루즈벨트의 총수요를 늘리는 뉴딜정책도 일부 도움이 되었고 이외에 유럽대륙의 정세불안에 따른 미국으로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군수물품외 그에 따른 파생산업이 폭발적으로 생산과 수요로 이어지면서 대공황을 마감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