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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대공황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6. 8. 04:31

    미국의 경제공황은 곧 세계의 대공황을 의미하게 되었다. 과거의 불황기에 공업생산 감소 폭이 7%였지만 세계 대공황 기간에는 44%에 이르었다. 국가간 무역은 1929년에 680억달러에서 1933240억달러 1/3로 줄었다. 전 세계 경제가 뒷걸음질 치는 사상 최악의 경기후퇴였다. 미국은 대공황에 직면하자 먼저 150억달러에 달하는 대외투자금을 환수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가장 파격을 입은 것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였다.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독일은 미국의 투자에 힘입어 1920년대 후반에는 경제를 거의 재건해가던 참이었다. 그러나 미국 자본이 갑자가 빠져나가자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생산의 50%가 줄고 실업자는 생산인력의 40%600만명으로 불어났다. 영국과 프랑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들은 본국과 식민지 간에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보호무역을 강화해 충격을 완화했다. 경제블록마다 관세를 천정부지로 올리고 수입을 막아 국제무역은 더욱 위축되었다. 반면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그럴만한 식민지도 자원도 없었다. 경제난과 실업을 타개하려면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바로 침략전쟁을 통한 시장확장, 즉 고대시대에 자행된 약탈로의 회귀였다. 경제의 붕괴는 대개 체제의 급변으로 이어지는데 세계 대공황은 전체주의라는 괴물을 키웠다. 먼저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파시즘 정당 나치스의 당수가 되었다.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고 나치스는 정적들이 비하하기 위해 붙인 별칭이다. 나치스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 총선에서 베르사유조약 파기, 위대한 게르만족, 반유대인, 반공산주의 등을 내걸고 1932년 총선에서 제1당으로 되었고 히틀러는 1934년에 국가원수인 총통에 올라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나치스는 쿠데타가 아닌 선거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다. 경제 위기에 지친 국민의 다수가 강력한 독일 재건을 내건 히틀러를 지지한 것이다. 나치스는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몰아넣었는데 이는 독일 배상금을 결국은 유대자본의 대표격인 로스차일드가 챙겼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나치스가 군비를 늘리고 공산주의를 탄압하고 공포정치를 폈어도 국민의 지지를 더욱 단단해졌다. 아우토반(고속도로) 건설 등 공공사업을 펴고 대량생산한 폴크스바겐(국민차)을 노동자의 월급에서 공제하는 방식으로 보급해 경제난과 실업난을 해소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1922년 무솔리니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1차대전에 승전국이면서 물가 5배로 뛰는 경제 위기를 맞아 정권이 뒤집힌 것이었다.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무력 병합했다. 일본은 전후 불황과 관동대지진(1923)으로 고전하던 차에 경제대공황(1929)까지 겹쳐 충격이 극심했다. 수출이 절반으로 줄고 300만명이 노동자의 일자리를 잃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그 돌파구를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 침략전쟁에서 찾았다. 에스파냐에서도 1936년 전체주의자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켜 인민전선정부를 전복시켰다. 곧이어 에스파냐 내전이 벌어졌으나 독일,이탈리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프랑코가 정권을 거머쥐었다. 이 내전에 인민전선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험으로 작가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를 썼다. 세계공황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잠자던 전체주의라는 괴물을 깨우고 말았다. 전체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제국주의에다 정치 선동고 민족주의적 광기를 더한 확장판이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토대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대외침략을 일삼는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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