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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는 왜 민비를 며누리로 삼았을까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1. 6. 29. 05:04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0년간 권력을 잡고 고종이 22살에 왕위를 내주고 2선에 물러났으나 한때 임오군란과 갑오개혁때 잠시 권력을 잡았다.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에 와신상담하면서 숨고르기를 하며 지내다가 권력을 잡으면서 안동김씨 일가를 숙청하고 양반들에도 군포를 내는 호폐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위의 권위를 세우는 경북궁을 재건하는데 인플레이션 유발하는 당백전을 발행하는 실책을 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지지기반이 미약하여 인재등용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고종이 15살 되던 해에 흥선대원군은 처가쪽에 세력이 없는 초라한 여흥 민씨 집안 16살인 민비를 결혼시켰다. 그런데 고종은 유모인 이상국을 좋아하여 아들 완화군을 낳아서 민비는 절치부심하며 고심하며 중국역사서 등 독서에 심취하였다, 그리고 애지중지하던 둘째아이가 흥선대원군이 선사한 산삼에 복통이 나서 죽어 대원군을 원망하고 싫어했다고 한다. 고종과 민비가 을사의병장인 최익현을 통해 종친의 정치참여를 금지해야 한다고 전국의 유생이 들고 일으키며 대원군 하야를 주도하였고 흥선대원군은 1873년 권력을 이양하고 민비 친정체제가 집권했다. 또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일어난 프랑스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인양요와 미국이 통상요구를 일으킨 신미양요를 물리친 위정척사사상이 민비체제하에서 무너져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게 굴복하여 최초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상왕노릇을 하고 싶은 흥선대원군은 초라한 집안의 민비를 며느리로 간택하였으나 결국은 민비와 민비일가의 노림수에 자식인 고종과도 멀어지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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