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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을 꿈꾸는 번영의 섬인 대만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6. 5. 12. 01:19

    20세기 후반이 되자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네 호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에 이어 경제발전의 궤도 올라섰다. 이들 모두는 식민지 경험을 극복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사례가 되어서 세계가 놀랐다. 한국과 타이완은 수십 년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홍콩과 싱가포르 또한 대영제국의 아시아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미국도 식민지에서 출발하기는 했어도 영국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성장한 강대국이다. 게다가 이미 18세기에 영국에서 독립한 뒤 산업혁명이라는 대변화를 맞아 유럽과 거의 동시에 경제발전의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아시아의 네 호랑이는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 노릇을 하며 작은 규모의 나라들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타이완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는 중국령으로 복속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혈통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타이완은 중국인들의 땅이다. 타이완에 사는 주민 대부분이 중국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국에 뿌리를 둔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을 영국인들의 땅으로 보지는 않는다. 종족적이고 문화적으로 강한 연대가 존재한다고 반드시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이완이 중국대륙의 왕조에 정식으로 편입되는 것은 1684년 청나라 때다. 황하와 장강이 중원을 무대로 전개된 중국의 역사에서 장강 이남은 주변부였고 거기서도 바다 건너에 있는 타이완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17세기 타이완을 지배한 나라는 네덜란드로 1604년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 진출한 동인도주식회사는 1624년에는 타이완까지 세력을 확장해 제일란디아라는 군사기지를 세우고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했다. 네덜란드는 500여명의 군인을 주둔시키면서 중국 복건성에서 이주해온 농민들에게 논과 밭을 일구도록 했고 당대의 고가 상품인 설탕의 원재료가 되는 사탕수수 재배에 힘썼다. 아열대기후인 타이완은 스페인과 영국도 눈독을 들였다. 1662년 정성공이 군대를 이끌고 제일란디아 기지를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들은 여진족에 저항한 명나라 잔존 세력으로 알려졌다. 장성공의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태어난 곳은 규슈였다. 그러다 1683년 청나라가 타이완을 차지하게 된다. 19세기말까지 200년간 청나라에 편입되었다. 1790년 이후 중국 남부 복건성과 광둥성 사람들을 중심으로 타이완에 이민한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패한 뒤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에서 타이완을 일본의 식민지로 내주었다. 타이완은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등 유럽 세력의 아시아 진출기지로 사용된 뒤, 중국과 일본에 차례로 지배되었다. 타이완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5만명의 주민이 청나라를 선택해 타이완을 떠났고 결국 3만명이 돌아왔다고 한다 문화와 언어는 베이징 쪽에 가깝지만 청나라 또한 오랑캐인 여진족의 나라이다. 청나라 시기에 과거에 합격해 중앙의 관제에 진출하고 다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는 모습에서 타이완은 독립적인 사회가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시모노세키조약에 반발해 타이완공화국을 선포하고 저항했으나 당시 공화국 총통은 청나라 관료 당경숭이 맡아 상징적 저항에 나섰다. 13일만에 진압되었다. 일본은 타이완 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과 봉건적 유산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우선 아편의 소비와 남성의 변발 그리고 여성의 전족을 3대 악습으로 규정하고 없앴다. 1989년에는 근대적 초등학교 제도를 시행해 식민지 교육정책을 펼쳤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타이완은 다시 중국에 복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2.28사건은 타이완 역사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9472월부터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군대가 타이완인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 충돌로 중국 외성인과 타이완 본성인의 대립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1949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세력이 대륙에서 공산당에서 패한 뒤 타이완으로 피신함으로써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국민당의 점령지로 돌변했다. 타이완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국민당 정부의 계엄령 아래에서 또 다른 강압 정치에 지배당했다.

    역사는 역설로 가득한데 타이완의 경우 대륙에서 건너온 소수의 국민당 세력이 철권통치를 하는 시기에 고속 경제성장의 궤도에 올라 부국굴기에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는 중심부가 주변부를 착취하고 수탈하는 구조다. 반면 타이완은 국민당 세력이라는 중심부가 주변부 타이완에 직접 와서 정착한 뒤 수탈하고 착취했기 때문에 부의 지리적 이전보다는 현지 축적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에 국가가 기득권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 즉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설계하고 미래를 계획해서 골고루 분배되는 경제성장과 발전이 하였다. 동아시아 발전국가론은 일본을 비롯해 한국 타이완 등에서 국가가 기득권층의 단기적 이익에 봉사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장기발전의 궤도를 놓기 위해 노력했다고 분석한다. 농경사회에서 기득층이란 지주계층이다.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넘어온 국민당 세력은 1949년부터 평등을 지향하는 혁신적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타이완의 계엄체제에서 노동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국가가 원하는 발전전략 추진에 걸림돌이 줄어들었다. 타이완은 1950-60년대에 이미 6-12%수준의 연평균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1980년대는 8% 1990년대는 6.5%를 기록하고 1인당 국민소득도 1990년이 되면 1만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타이완의 경제성장은 1980년대까지 균등한 분배를 특징으로 한다. 한국과 일본의 재벌 경제와 달리 타이완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타이완은 이웃 중국의 성장과 함께 국가의 존폐를 항상 위협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타이완의 생존을 보장해주던 동아시아 냉전 구도가 1970년대 들어 조금씩 해빙되자 타이완에 대한 위협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1971년 국제연합은 중국을 대표하는 권리를 타이완의 중화민국에서 빼앗아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넘겼다. 군사동맹인 미국마저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타이완은 국제사회의 고아 신세로 전락했다. 1991년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던 남북한과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은 철저하게 하나의 중국을 고집하면서 세계에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타이완과의 관계를 단절했던 일이 세계 각지에서 반복되었다. 타이완은 이로써 실질적으로 존재하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살아 있는 유령국가 신세가 되었다. 1979년 개혁개방 정책으로 시작된 중국의 경제발전에서 아시아 네 호랑이의 역할은 컸다. 타이완의 경우 거대한 중국대륙을 성장의 궤도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직접 담당했다. 중국이 초기 경제발전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개방했던 선전, 샤먼, 산터우 등의 경제특구는 홍콩과 마카오 그리고 타이완과 좁은 해협을 염두에 둔 지리적 선택이었다. 1987년부터 타이완 정부는 중국대륙에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한 타이완인의 방문을 정식 허락했다. 이로써 타이상들의 대륙 러시가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의 노하우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중국의 경제발전에서 타이싱은 슘페터가 강조한 연결과 조합의 능력을 발휘했다.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공산당 간부는 시장을 몰랐다. 또 외국의 자본가는 중국어나 중국 관습에 무지했다. 공산당 정부나 외국인 사업가가 할 수 없는 일을 도맡아 추진한 것이 바로 타이싱이다. 중국의 지방정부는 이런 타이싱을 유치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타이완 자본을 바탕으로 한 노동집약적 산업은 광둥성으로 대거 이전해 신발 우산 섬유 플라스틱 등의 부문에서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하게 해주었다. 현재 중국에는 100-300만명 정도의 타이완인이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면서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중국에 가서도 타이완인 마을을 형성해 생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은퇴 후 삶의 터전으로 여전히 타이완을 꼽는다는 점이다

    타이완이 중국 경제발전의 견인차라는 등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미국의 애플과 타이완의 폭스콘이 협력해 중국에서 생산하는 아이폰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한 애플의 아이폰을 생산하는 것은 타이완의 폭스콘이라는 기업이다. 그러나 타이완은 미국이나 중국처럼 국가와 정부가 국제무대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외부에서는 고아 신세이지만 타이완 내부는 민주화를 통해 정기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루는 모범국가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1980년대까지 삼엄한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한 이후에도 아들 장징궈가 정권을 이어받아 1988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1986년 민주진보당이라는 야당이 만들어졌고 점진적으로 체제의 자유화가 이뤄졌다. 1996년 치러진 타이완 최초의 직선제 총통선거에서 타이완 본성인 출신으로 덩후이가 당선되어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 다시 국민당의 마잉주 그리고 또다시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바람직한 모습이 계속되고 있다. 2014년 봄에 일어난 태양화 학생운동은 타이완이 현재 안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당시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은 중국과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을 체결해 추진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의회를 점령했다. 330일에는 50만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며 중국과의 경제 통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불거졌다. 이 협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2016년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이 56%의 압도적 득표율로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20201월에는 재선에 성공했다. 타이완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국민당은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지향한다 반면 민주진보당은 타이완에 원래 거주하던 본성인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민주진보당은 타이완의 독립을 주장한다. 중국은 타이완이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발언을 기회가 있을때마다 쏟아내고 있다 타이완은 중국이 홍콩의 자치권을 묵살하고 점점 직접 통치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타이완 정부가 홍콩에서 망명하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인 것은 민주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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