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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들-115) 비움의 사랑 / 오랜된 겨울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명시 2026. 3. 12. 01:14
< 비움의 사랑 - 박노해 >
없네
네가 없네
해는 뜨고 별이 떠도
네가 있고 그 자리엔
네가 없네
나 그렇게 살아가네
비움으로 살아가네
사랑이 많아서
비움이 커져가네
너와 함께한 말들도 비워지고
너와 함께한 색감도 비워지고
녀와 함께한 공기도 비워지고
나 홀로 있는
비움의 시간이 많아지네
여기 이 자리에 네가 없어도
난 네가 치지했던 그만큼의 공간을
그대로 비워두려 하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나는 결여된 사람이 되어가네
나는 비움의 파수꾼
나는 빈 사랑의 수호자
비움으로 너를 지키려 하네
이제 그 자리에 네가 없네
그 비움의 자리에 내가 사네
살아남은 사람은 어쨌든
다시 살아야 한다는 걸
나도 모르는 바 아니나
이 가득한 세계 한가운데서
나는 점점 제외되어가네
사랑이 많아서
비움이 커져가네
슬픔이 많아서
비움이 푸르르네
비움이 깊어서
가득한 사랑이네
< 오래된 겨울 - 전길중 >
어머니 눕는 시간이 길어지고
타르를 뱉으며 가랑거리는 아버지
식욕 떨어진 백점병 걸린 물고기다
된장 냄새 넘치는 옹기나
들고 있는 뜨거운 커피잔에
알지 못할 불안이 넘실거리면
벽에 기댄 빗자루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멍에를 벗으려는 쇠방울 소리가
소란을 일으키는 새벽
밑그림으로 잡은 산등성이 햇살이
처음 잡은 붓처럼 떨린다
풀 뜯는 소리를 내는 황소바람 무서워
봄이 쉽게 오지 못한다
꽃 피면 봄, 봄이면 꽃 피는 법
어서 피어야 하는데
발효된 한숨이 목구멍을 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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