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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들-117) 못 견딜 고통은 없어 / 겨울 연못 / 그러나 그러지 마라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명시 2026. 3. 26. 01:44
< 못 견딜 고통은 없어 - 박노해 >
젊어서 못 견딜 고통은 없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의식을 잃거나 죽고 마니까
살아있다면 견디는 거지
고통에도 습관의 수준이 있어
그러니까, 고통을 견뎌내는
자기 한계선을 높여 놓아야 해
평탄한 길만 걷는 자들은
고원 길이 힘들다 하겠지
젊은 날엔 희박한 공기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봐야 해
더 높은 길을 탐험해 본 자에게
고원쯤은 산책 길일 테니까
자신의 두발로 생존 배낭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묵직이 올라서던
심장이 터질 듯한 그 벅찬 길이
자긍심이 되고 그리움이 될 테니까
사람들은 정작 자기 시대가
얼마나 좋은 시대인지를 모르지
나만 고통스럽고 나만 불행하고
나만 억울하다고 체념하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은
물리적 몰락이나 통증이 아냐
심리적 물락이고 영혼의 붕괴이지
우린 인간 자신으로 강해져야 해
고통에 민감하되 잡아먹혀선 안돼
젊어서 못 견딜 고통은 없어
고통을 견디는 강도만큼이
잉태의 크기이고 희망의 크기야
고통받을 그 무엇도 하지 않으면
무엇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 테니까
< 겨울 연못 - 전길중 >
달거리 하다 피 묻은 옷을
나무가지마다 걸어 놓은 여자를
그윽하게 내려보던 하늘이
물 위에 햇살을 톡톡 터트린다
바위틈에 끼어 굽은 허리와 멍든 힘줄은
영역을 지키기 위해 타고난 숙명이다
산 그림자가 불안한 새 떼의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은 징조를 예고한다
움직임이 둔한 물 먹은 이파리들
제 새끼처럼 핥아주는 햇살의 귓볼을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바람
조현병을 앓는 불임의 여자다
물고기 바늘이 점묘화로 찍힌
살얼음 자궁을 힘없이 여닫는 연못
온종일 앓는 소리다
< 그러나 그러지 마라 - 박노해 >
그들은 빛도 없이 떠나가리라
그들은 지혜도 없이 늙어가리라
그들은 사랑도 없이 연명하리라
그들은 희망 없이 죽어가리라
그들은 제사 없이 잊혀가리라
그러나 그러지 마라
그래도 그러지 마라
그러니 그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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