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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분리 원인은 무엇이었나 ?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5. 9. 11. 02:36

    세계 제 2위의 인구 대국인 인도, 그리고 그 동서에 있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약 60년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나라였다. 그러나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었다. 이는 인도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힌두교도와 소수 이슬람교도 사이의 뿌리 깊은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인도에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8세기부터였다. 조금씩 인도를 침입하던 이슬람 세력은 바부르가 인도의 혼란을 틈타 갠지스강 유역을 정복하고 델리를 수도로 삼아 무굴제국을 세우면서 완전히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무굴이란 아랍어로 몽골을 뜻하는데, 이는 바부르가 칭기즈 칸의 후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굴제국은 다수 주민인 힌두교도를 회유하지 않고서는 인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힌두교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이 때문에 무굴 제국은 인도반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도에는 이슬람 세력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급진적으로 인도 전체의 이슬람화를 추진하면서 힌두교도들의 불만을 사 결국 제국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무굴제국이 혼란에 빠진 18세기 후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영국은 자유 통상권을 얻으며 점차 세력을 넓게 갔다. 19세기가 되자 마침내 영국은 무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면서 주민들 간의 단결을 막기 위해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대립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힌두교의 지도자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교의 알리 지나가 이끄는 전인도이슬람연맹이 일치 단결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수의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따로 이슬람국가가 세워졌는데 이 나라가 바로 파키스탄이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사망했으며 영토가 확정되면서 1500만명의 주민들이 힌두교도는 인도로,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이동해야 했다. 1947년파키스탄은 처음에는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된 형태로 독립했는데, 이는 벵골 분할령 때문이었다. 벵골 분할령이란 1903년 영국 지배 당시 행정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반영운동이 활발한 벵골만 지역을 분할하여 서벵골의 힌두교는 거주 지역과 동벨골의 이슬람교도 거주 지역으로 분리하여 통치한 것을 말한다. 동서 파키스탄은 지리적으로 1600km나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문화, 전통에도 큰 차이가 있었지만 인도에 대한 불신으로 한 국가를 이루었을 뿐이었다.

     

    정치와 경제는 모두 서파키스탄이 관장했기 때문에 열세에 있었던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이에 동파키스탄은 독립을 요구했고 이에 반대하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결국 1971년 인도의 지원을 받은 동파키스탄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벵골의 나라를 뜻하는 방글라데시로 국명을 바꿔 독립했다. 현재도 인도에서는 다수의 힌두교도들과 소수의 이슬람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2008년 인도의 뭄바이에서 발생한 테러는 이슬람 세력인 파키스탄의 무장단체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카슈미르는 캐시미어 염소의 연한 털로 짠 직물인 캐시미어로 유명한 곳으로 인도, 파키스탄, 중국에 둘러싸여 있으며 1100만명이 거주하는 산악지대에 있다. 그런데 인도 독립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지지 않아 분쟁 지대가 되었다. 이 지역을 둘러싸고 대립한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자칫하면 핵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곳이다. 카슈미르 분쟁의 원인은 카슈미르 지방의 영토 귀속 문제였으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10세기부터 계속되어 온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적 대립이다. 1947년 파키스탄과 분리될 때 카슈미르 주민의 절대 다수인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요구했으나 지방 토후왕인 하리싱이 인도로의 편입을 결정하여 이때부터 분쟁이 시작되었다

    타지마할은 세계 건축미의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흰 대리석 조각 예술의 극치로 타지마할을 보지 않고는 인도를 정수다.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빛깔이 달라지며 건물과 입구의 수로 및 정원의 완벽한 좌우 대칭은 균형미와 정갈함을 느끼게 한다. 1983년 타지마할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인도에 위치한 이슬람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뭄타즈 마할 왕비는 왕자를 출산하던 중 젊은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타지마할은 왕비를 끔찍이 사랑했던 샤 자한 대제가 그녀의 넋을 위로하고자 만든 것이다. 외국의 건축가와 기술자, 최고급 자재 등을 조달하면서 22년 동안 매일 2만명의 인부가 동원된 대공사였다. 샤 자한은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대리석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타지마할이 완공은 후 여기에 동원된 유명한 석공들의 손가락을 자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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