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동아시아 발전의 선두주자인 일본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5. 4. 24. 03:00

     

    서구는 16세기부터 500년 가까이 세계경제를 지배했다. 초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의 선두주자들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진출하면서 통합된 세계경제 체제를 만들었고,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대서양 양쪽의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나라들이 새로운 중심을 등장했다. 세계 자본주의는 유럽문명의 배 속에서 잉태되어 지구를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부상한 셈이다. 일본은 서구 중심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처음으로 균열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19세기 중반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까지 진출해 제국주의를 펼치던 무렵만 해도 중국과 일본은 비슷했다. 1840년대 당시 세계의 패권국 영국은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문을 열었고 10여년 뒤 미국은 매슈 페리 제독의 함대를 파견해 강제로 일본을 개방했다. 청나라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시도했지만 근본적인 근대화 궤도에 올라서는 데 실패했다. 반면에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상징되는 변화의 기치를 내걸고 부국강병을 추진한 결과 서구와 견줄 만한 근대 선진 국가 건설에 성공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중심 청나라를 무너뜨리면서 근대화에 성공했음을 알렸다. 동아시아의 선두주자로 나선 일본은 때로는 침략과 강탈의 제국주의 세력으로 때로는 모방과 학습의 시범 사례로 앞서 달려 나갔던 것이다

    일본의 신속한 근대화 성공을 단순히 한 시대를 책임질 엘리트의 선견지명이나 뛰어난 능력만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근대화 이전 도쿠가와 막부 시대(1600-1867)의 일본은 이미 다양한 성공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정치의 안정과 분점이다. 일본은 16세기 말 한반도와 대륙을 차지하려는 전쟁에서 실패한 뒤 일본열도의 막부 지배체제를 탄탄히 구축해 270여년에 달하는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막부체제는 권력의 집중과 분산을 교차시키는 흥미로운 형식의 정치를 실현했다. 국가의 상징적 권력은 여전히 천황에게 있지만 실질적 권력은 막부에게 독점하는 집중과 분산의 대항관계가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천황의 교토와 막부의 에도가 대립하는 관계였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은 중앙집권적인 반면 일본은 유일하게 봉건제였다. 물론 중앙 막부의 권력이 지배적이었지만 지방의 번은 권력 분산의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 체제에 마찬가지로 일본의 막부 또한 에도에 지방 번주의 가족을 상주시켰다. 둘째는 상업문화의 발전이다. 정치구조가 경제에 반영되어 막부가 있는 에도가 프랑스의 파리처럼 집중적으로 발전했다. 18세기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에도였다. 일본은 근대화가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경제의 중심에 있었다. 왜냐하면 대도시의 형성은 왕성한 경제활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에도와 번의 자진 왕래로 상업문화의 발전과 확대에 이바지했다

    셋째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커진 학습에 대한 열정이다. 일본은 쇄국정책을 시행하면서도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간헐적으로 개방해 네덜란드와 교역을 유지했다. 그 결과 유럽의 정보와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학문이라고 해서 란학이라 불린 지식 인프라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문명을 신속하게 받아들이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은 개국 이전에 이미 서구의 언어를 학습하기 위한 사전이 있었고 번역된 책이 다수 존재했으며, 이를 전공하는 상당수의 사무라이 학자가 있었다. 학습에 대한 유교적 열정과 란학이라는 지식 인프라가 만나면서 서구문명의 대량 수입을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다. 한편 메이지유신을 통한 본격적인 정치개혁 이전에 이미 일본은 서구를 모델로 하는 부국강병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1853년 미국 증기선의 위력을 경험한 일본은 네달란드에서 선박을 긴급 수입했고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을 통해 항해술을 배웠다. 일본 최초의 근대적 군함 간린마루는 1860년 시나가와를 출발해 태평양을 걸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일본의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국에서 웹스터 사전을 사 들고 귀국했고 기존의 란학을 바탕으로 영어, 프랑스어 등 서구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 학문과 기술을 일본의 것으로 소화하는데 앞장섰다. 중앙의 막부가 지배하면서도 형식적으로 다원구조였던 일본은 번을 중심으로 개방정책에 나섰던 셈이고, 결국 이 운동은 천황-막부의 이원구조를 활용해 메이지유신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은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연합 세력이 천황을 중심으로 통일정권을 수립하는 한편 중앙정부가 위로부터의 근대화 전략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사무라이

    실제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국가로서 일본의 가장 커다란 목표는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무라이집단이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지배한 것은 평화적인 유교 전통의 인문주의자이자 학자였지 칼을 다루는 무사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전쟁을 업으로 삼는 기사와 귀족이 지배하는 유럽과 비슷했다. 사무라이 수도 서유럽의 기사보다 많았다. 프랑스의 귀족 비중이 2%라면 일본의 사무라이는 6%에 달했다 도쿠카와 막부의 평화시대에 전쟁의 업으로 하는 사무라이계층은 잉여집단으로 전락했다. 메이지유신에는 근대화의 첨병으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칼을 버리고 책을 든 사무라이는 근대국가의 관료로 안성맞춤이었다. 근대 기업가도 사무라이계층에서 대거 탄생했다. 서구 상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본주의 문화가 일본에 와서는 국가 건설과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은 반세기 동안 지속한 일본의 근대화 노력이 거둔 성공을 증명하는 사건들이다. 일본은 두 전쟁으로 타이완과 한반도를 제국의 영토로 병합하면서 제국주의를 답습해 갔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일본의 모델로 삼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이었으며 미국 또한 태평양과 대서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세계적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1922년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해군조약은 일본이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강국으로 부상했음을 명확하게 보였다.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내무경을 맡은 히로부미는 1880년대 일본의 면직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가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1890년대가 되면 일본의 면직시장은 거의 일본의 자체 생산품으로 채워졌고 1920년에서 1937년까지 일본 면직산업은 황금기를 맞게 된다. 1933년은 일본의 면직 의류 수출이 영국을 초월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다. 일본은 해군력과 면직산업에서 영국과 미국을 바로 뒤쫓는 제 3의 세력으로 떠올랐다. 1929년 세계 공산품 수출시장에서 영국, 독일, 미국은 각각 20%정도를 차지했고 프랑스가 10%를 차지했으며 일본이 4%를 차지하다가 1937년 프랑스를 제치고 4대 공산품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당시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세계가 어려움에 부닥쳤던 시기에 기존 강대국들의 틈새를 비집고 성장해 자신의 입지를 굳혀야 하는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군부의 모험주의는 미국과 충돌로 처참한 원폭 피해를 경험하게 되었다. 한편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 질서인 브레턴우즈체제에서 일본은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린 나라였다. 미국은 냉전의 상황에서 자유진영 국가들에 자국의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수출을 통한 경제발전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평가된 엔화를 통해 수출에 큰 도움이 되었고 국방을 미국이 담당함으로써 군사비용의 부담을 덜 수도 있었다. 평화와 경제 중심 전략으로 1955년과 1975년 사이 일본의 연평균 국내총생산은 8.6%에 달했고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은 9%라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일본은 면직산업에서 영국을 추월했듯이 후반기에는 자동차 산업에서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원래 직물기계 산업을 기반으로 사업을 일으킨 도요타는 1930년대부터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해 20세기 세계 최대의 자동차기업으로 올라섰다. 일본의 도요타 외에도 닛산, 미쓰비시, 혼다, 마쓰다 등 다수의 자동차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또 전자산업에서도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로 떠올랐다. 1960년대에는 트랜지스터를 활용하는 가내 전자제품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차지하면서 소니, 도시바, 히타치, NEC, 파나소닉 등 다수의 세계적 브랜드를 보유하게 되었다. 카메라의 캐논이나 복사기의 리코 등은 20세기 후반 세계 전자제품 시장을 풍미한 브랜드들이다. 이처럼 다수의 유능한 기업군을 정부가 조정하고 조율하면서 일본은 세계시장을 점령해나갔다. 그러다가 1990년 부동산 버블로 붕괴하면서 일본은 30년의 장기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이외 인구의 정체와 고령화, 비생산적인 공공 부문에 대한 투자, 혁신적 사고와 시도를 억누르는 보수적 문화 등이 모두 침체를 지속시키는 원인이었다. 1980년대는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장밋빛 예측도 있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 규모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를 유지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국제 분업구조에서 일본은 한국, 타이완, 중국으로 연결되는 생산기술의 중요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부가가치가 높고 핵심적인 부품 생산에서 여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부국 계보에서 일본은 독일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나라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경제발전의 후발주자에 속하는데 각각 1868년의 메이지유신과 1871년 독일제국 건국과 함께 신속한 발전의 궤도에 올랐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경제적 성공의 결실을 군사적 모험으로 날려버렸다는 사실도 공유한다. 또 두나라 모두 전후에는 강병의 선택지를 버리고 경제에 집중한 결과 놀라운 성장의 기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일본과 독일은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걸었다. 독일을 통일을 이룸으로써 국가의 규모를 키워 다시 웅비하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유럽 통합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과거의 반성하고 이웃을 안심시키면서 미래 발전의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독일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유럽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인구 감소 문제도 순혈주의를 포기하고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으로 전환해 새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반면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씹으며 이웃과의 관계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평화적 경제발전의 길에서 벗어나 지금은 다시 군사적 정상국가를 꿈꾸는 상황이다. 일본은 실제 인구가 매년 감소하는데도 이민으로 새로운 피를 수혈할 상상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이 유럽연합이라는 세계 최대 경제 공동체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일본은 중국에 동아시아의 중심 걸리를 빼앗긴 것은 물론 한국과도 역사를 둘러싼 분쟁으로 힘을 합치지 못하는 형국이다. 향후 일본이 동아시아 발전의 선두주자라는 역사적 징표만을 남긴 채 무기력하게 침몰할지 아니면 솔직한 반성과 새로운 정신을 바탕으로 19세기 중반과 같은 혁신의 능력을 보여줄지 의문이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