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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보디아는 어떻게 민족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
    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5. 1. 3. 03:00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에는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5개국이 있다. 이 나라들은 수많은 소수 민족이 결합한 다민족 국가로서 민족간 갈등으로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반도의 다른 국가와 달리 크메르인이 인구의 약 90%를 차지하여 단일 민족 국가라 할 수 있다. 크메르인은 선사 이래로 인도차이나반도 남부 메콩강 부근에 살던 황인종계의 원주민과 서방에서 이주해 온 인도계 사람들과의 혼혈로 등장했다. 크메르 문명은 이들 크메르인이 세운 동남아시아의 최초의 국가인 부남국에서부터 시작된다(부남은 산을 의미하는 프놈이라고도 하는데 수도 프놈펜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부남국은 메콩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국으로 번성했으며, 인도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크메르 문자를 만드는 등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800년경 자야바르반 2세가 크메르 왕국을 세우면서 크메르 문명은 최고 전성기를 맞는다. 대사원 앙코르 와트와 도성 앙코르 톰과 같은 장대한 석조 건물이 세워지면서 그 문화는 활짝 피어났다. 크메르 왕국을 앙코르 왕국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에 앙코르평야를 무대로 크메르 문화가 융성했기 때문이다. 13-14세기에 이르러 타이와 베트남이 번갈아 침입하면서 수도 앙코르가 여러 차례 함락되자 크메르 왕국은 수도를 남쪽인 프놈펜으로 옮겨야 했다. 그들 국가의 계속된 침입을 받으면서 힘겹게 왕국의 명맥을 이어 나갔던 크메르 왕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한 프랑스에 보호를 요청하여 스스로 프랑스령이 되었다. 시아누크 국왕의 노력으로 1953년 캄보디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도 캄보디아가 크메르인 중심의 민족국가로 설 수 있었던 것은, 크메르인의 강한 민족적 자긍심과 삶의 정신적 지주인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앙코르 와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코르 와트를 불교 사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앙코르 와트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브라만교의 주신 가운데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해 건립한 힌두교 사원이다. 신의 아들로서 신과 대중을 연결해 주는 대변자임을 만천하에 보여 주어 왕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지은 것이다. 앙코르 톰은 자애바르만 7세가 세운 왕궁이자 도성으로 이후 여러 왕을 거치며 증축되었다. 내부에는 바욘, 바프욘, 피메아나카스 등의 여러 사원이 있다. 이 가운데를 불교 사원인 바욘 사원안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웃는 얼굴이 새겨진 50개의 불탑이 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앙코르 와트 대부분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암은 그 특성상 빗물에 쉽게 침식된다. 관리가 제대로 안 된 데다가 무성히 자라는 풀, 빗물 등 기타 자연현상으로 유적이 많이 황폐해졌다. 현재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 문화대혁명

    독립 후 캄보디아에서는 내전이 거듭되었고 1975년에 캄보디아 공산당인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가 정권을 장악했다. 본명은 살롤스 사이지만 political potentialpolpot에서 따온 말인 폴 포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치 농경사회라는 이상향 건설을 위해 도시 주민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대형 토목 공사에 동원하여 중노동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게 했다. 의사, 교사, 기술자 등의 지식인층을 민중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으로 몰아 각종 도구로 고문하고 처형하여 1979년까지 약 15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캄보디아는 죽음의 땅인 킬링필드로 알려지게 됐다. 폴 포트의 극단적이고 무모한 사회주의 실험은 캄보디아의 태평성대를 재현하기는커녕 캄보디아을 절망과 죽음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극악무도한 야만성과 참상이 알려지면서 폴 포트는 전 세계로부터 고립되었으며 1979년 폴 포트 정부는 베트남에 의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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