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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전의 뒤편에서 일어난 치열한 경제 전쟁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5. 2. 11. 03:00

    냉전은 군사적 대립이외에 커다란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 냉전은 미국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도록 만드는 구조였다. 1950년대에는 군사비가 미국 국가 예산의 70% 가까이 차지했던 시기도 있었으며 냉전 시기를 통틀어 매년 30%의 안팎의 군사비를 치렀다. GDP 대비로 따지면 1950년대와 1960년대 20년간 GDP10% 안팎에 상당하는 군사비를 지출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의 20년간에는 5-10%정도의 군사비를 지출했다. 참고로 지금은 3-4%. 비용 규모로 보자면 미국은 냉전 중이던 약 반세기 동안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냉전은 미국에 군사비 이외에도 타국을 지원하는 데 필요하기도 했다. 특히 이집트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소련에게서 아스완하이댐 건설을 위한 경제원조를 받다가 1970년대에 접어들어 소련의 경제적 악화로 지원을 꺼리자 미국에 접근하여 매년 20억달러나 되는 경제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냉전 중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경제를 지원을 통해서 경제가 악화되는 면도 있었다. 냉전이란 미국과 소련 양국 입장에서는 서로의 인내심을 겨루듯 지원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세계 냉전 전쟁

    미국은 서방 진영의 경제부흥을 위해 마셜플랜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지원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 경제를 고통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서방의 유럽국가들 특히 서독과 일본은 경제 부흥을 추진하여 경쟁력 있는 공업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자 미국의 수출력은 크게 저하되었고, 1971년에는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락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미국이 지녔던 경제대국이라는 지위는 물론 세계의 은행이라는 지위 또한 위협하는 것이었다. 1944년 브레튼우즈협정에 따라 세계경제의 기축통화로 달러가 쓰이게 되었다. 당시 달러는 전 세계에서 금과 태환이 가능한 유일한 통화였다. 영국, 프랑스 등이 금이 부족해서 통화를 금으로 태환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가운데, 미국은 전 세계 70%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금 태환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신용을 바탕으로 달러는 전 세계 기축통화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미국의 무역 적자 규모가 커지자 금으로 교환되는 달러는 갈수록 많아졌고 미국이 보유한 금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 후반부터 급격한 기세로 미국의 금이 국외로 유출되었다.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더 이상 무역 적자를 내지 않기 위해 수입품에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마저 성과를 내지 못하자 미국 달러와 금 교환 정지를 발표했다. 이것이 이른바 닉슨쇼크다.

     

    냉전의 한축인 소련의 경제도 결코 좋지 않았다. 소련의 경제 악화가 진행되는 속도는 더 빨랐다. 건국 당시 소련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경제성장을 보여주었으나 전후 부흥을 얼추 마치고 나자 정체 상태를 접어들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는 급격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공업 제품은 동유럽 국가들이 어떻게든 사주었으나 그 외 지역에서는 국제적인 경쟁력이 전혀 없었다. 소련은 서방국가들의 제품은 구입했지만 소련에서 수출 가능한 것들이 그다지 없었던 탓에 달러나 파운드 같은 외화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소련의 주된 수출품은 석유였으며 석유가 외화의 60%를 벌어다주었다. 경제 시스템으로 보자면 개발도상국 수준이었다. 한편 공산주의란 상명하복 경제 시스템이다. 그와 같은 경제체제는 가난한 국가가 즉각적으로 국가를 재건하려 할 때는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국가의 인재와 자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지점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획적 경제는 경제가 역동적으로 발전하거나 기술이 진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전후 20년이 흐르자 풍요로움은 물론 기술 면에서 서방 국가들과 격차가 뚜렷해지기 되었다. 1980년대 되자 소련 동유럽과 서방 국가들의 경제적 격차는 한층 현저해졌다. 당시 서방국가들에서는 컴퓨터 혁명이라고도 불릴 만한 산업 변혁이 일어났다. 소련은 정보산업이 발달하면 국가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소련 당국이 컴퓨터 보급을 관리하고 억제한 것이다.

     

    1980년대가 되자 미국과 소련 양국은 거액의 군사비로 고통을 받았고 점차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군사비로 3천억 달러 가까이 지출했으며 소련의 군사비 또한 2500억 달러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은 군축 교섭을 활발히 진행하게 된다. 군비 축소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만은 아니었으며 두 국가가 재정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도 적잖이 있었다. 거액의 군사비는 미국 경제를 점점 더 잠식해갔다. 1980년대는 공업제품 생산성 면에서 일본이나 서독에 추월당하여 세계의 공장 자리를 완전히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1987년의 무역적자는 1710억 달러로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다. 소련 쪽은 더 심각했다. 경제력이 저하되면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구심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동유럽국가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고 특히 헝가리는 시장경제를 도입한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폴란드에서는 국내 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면서 반체제파가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지경에 처했다. 1985년이 되자 소련은 커다란 변혁을 맞이한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한 것이다. 그는 그 이전의 지도자와 다른 신세대 지도자였다. 그 이전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운동을 하고 군대를 거쳐 당간부로 올라갔다 학력도 거의 없었고 고생을 겪으며 밑바닥에서 성공해 올라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국립대학 및 법과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소련이 육성한 엘리트 1기생 같은 존재였다. 대학에서는 공산주의뿐 아니라 서구의 경제와 사상도 배웠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취임한 후 개혁을 연거푸 단행한다. 그중에서도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다. 1986년의 공산당 대회에서 소련 경제의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다. 기업형태인 민간 조합과 개인 사업도 인정되었으며 농장주와 공장주의 자주성을 촉구했다. 나아가 서방국가들과의 제휴 및 자본 도입도 추진했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맥도날드 등이 소련에 진출했고 스탈린 시대에 숙청당한 사람들의 명예 회복 같은 정치적 자유화도 단행했다. 1988년이자 러시아정교회 1천주년에는 종교 규제도 대폭 완화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 군사비 삭감을 위해 미국과 군축회담을 추진했다. 1985년에는 미국의 레이건과 전략 핵무기를 50%삭감하는 등의 획기적인 군축 조약에 동의했다.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군사 지원과 분쟁 지역을 대상으로 한 파병도 대폭 축소했다. 특히 쿠바의 카스트로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여 갈등을 빚기도 했다. 나아가 198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모조리 철수시켰다. 그는 또한 글라스노스트라 일컬어지는 정보 공개도 추진했다. 그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소련 정부 내의 정부 일부를 국내외에 공개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과 동유럽의 해체를 급격히 진행시키고 만다. 이는 공산당의 부패도 공개되는 등 어두운 면이 알려지기 되었다.

     

    그리고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난 것이다 이것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예전 같으면 사고 자체를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고로 동유럽 국가들의 신용을 잃게 되었다. 소련은 1988년의 신베오그라드 선언을 통해 지금까지의 지도적 입장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동방 진영에 속해 있던 폴란드와 헝가리 등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198910월 고르바초프가 동독을 방문했을 때 피폐해진 경제의 동독과 서독의 분단에 불만을 품은 독일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동독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여행 자유화를 발표했다. 그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때려 부숴버렸다. 1991년에는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소련에서 이탈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발트 3국은 원래 독립국이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과 나치가 맺은 비밀 협정 때문에 소련에 병합되고 말았다. 그런데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독립을 향한 기운이 고조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 후 소련은 15개 공화국이 연방을 이루며 형성된 국가다. 그런데 1988년 이후 15개국과 자치구가 일제히 주권을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199112월 소련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국가인 러시아, 백러시아(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개국의 대표들이 비밀 회담을 열어 소련에서 이탈할 것을 결정한다. 이로써 소련은 붕괴되고 전 세계를 분단해왔던 냉전 체제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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