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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뒤흔든 후발주자인 독일의 야망에 대해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4. 11. 14. 03:13
21세기 독일은 유럽의 최강대국이다. 고대에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 민족이 중세에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현대의 로마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게르만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하는 호칭이다. 우선 게르만어파는 언어학적으로 라틴어파, 슬라브어파와 함께 유럽의 3대 어파 가운데 하나다. 독일어는 물론 네덜란드어나 스칸디나비아 지역 국가들의 언어, 심지어 영어가 모두 게르만어파다. 당연히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나의 민족의 형성한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으로 게르만 민족은 고대에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지역에 뿌리를 둔 부족들을 통합하는 이름이었다. 이들은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유럽의 남부와 서부로 대거 이동했고 심지어 북아프리카나 중앙아시아 등으로도 침투했다. 프랑스 지역에 나라를 세운 프랑크족이나 영국에 정착한 앵글족과 색슨족은 모두 게르만 민족의 부류들이며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고트족이나 바이킹도 모두 게르만계다. 근대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지칭하기도 한다. 일부 학자는 신성로마제국을 독일의 모태라고 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제국은 베네룩스,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등을 포함하는 전형적인 다민족제국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독일 지역도 수백개의 정치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중 근대 독일어를 사용하는 게르만 민족으로 구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나라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있다. 또 스위스와 룩셈부르크 국민의 다수도 게르만계다. 슬라브족이나 라틴족을 하나의 민족이라고 할 수 없듯이 게르만 민족을 독일 혼자 대표한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유럽에서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부족이나 민족을 하나의 정치 단위로 묶음으로써 더욱 크고 새로운 통합민족을 만드는 작업이다. 일례로 런던을 중심으로 형성된 잉글랜드 민족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아일랜드를 통합해 브리튼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었다. 또 프랑크족이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민족을 만든 뒤 점차 주변을 통합해간 과정도 그렇다. 서유럽의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중세 말기에 대표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이러한 민족 통합의 과정에서 놀라운 포용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게르만 민족은 너무 넓은 영토에 흩어져 있었을 뿐아니라 통합을 주도할 만한 마땅한 세력도 없었다. 실제 게르만계 합스부르크가문의 오스트리아는 게르만 민족의 나라를 만들기보다는 넓은 영토를 포괄하는 다민족제국의 형성에 더 관심을 보였다. 게르만 민족만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8세기 베를린을 중심으로 프로이센이 출범하면서부터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버금가는 독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왕국과 공국, 교회령, 자유도시 등으로 분열된 게르만 민족을 통일하는 과업에 나섰다. 특히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독일은 통일에 영향을 받았고 1870년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군사력과 외교력을 발휘해 차츰 통일을 이뤄나갔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 철혈수상으로 비스마르크의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1830년대부터 프로이센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관세동맹인 촐페라인은 통일 기반으로 작용했다. 정치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관세동맹은 통해 독일은 하나의 국민경제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촐폐라인은 산업혁명을 독일에서 실현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프로이센이 낳은 독일제국은 유럽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했다. 통일 독일제국의 처음 반세기(1871-1914)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모두 강화되며, 승승장구하는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독일과 미국은 영국을 뛰어넘어 새로운 산업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 신흥 산업국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은 영국보다 훨씬 새로운 기술로 더욱 큰 규모의 공장과 회사를 만들어 유럽 제 1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산업혁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철강이나 석탄 등의 생산에서 독일은 영국을 뛰어넘었고, 전기나 화학 등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서도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세계시장에서 고급 자동차의 대명사로 명성을 떨치는 벤츠나 BMW 또한 20세기 초에 등장한 독일 기업들이다. 특히 BMW는 뭰헨을 중심으로 한 독일 남부의 산업기수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비행기 엔진을 생산하는 군수기업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성공적인 후발주자였던 독일에 선발주자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가 자연스럽게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은 1884년에 열린 베를린국제회의에서 아프리카 분할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확장 일로를 걷는 국력에 걸맞은 제국이 되기 위해 충돌로 불사하는 전략을 취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독일이 역사적으로 품었던 민족주의 콤플렉스, 후발주자로서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제국주의 경쟁, 그리고 폭발적인 산업발전과 인구증가 등이 선사한 자신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개입과 독일 내정의 혼란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 세력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평화조약은 베르사유궁에서 체결됨으로써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획득했던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돌려줬야 했고 라인강이 서쪽을 연합군에 점령당하는 치욕적인 결과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1920년대 독일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바이마르공화국이 독일제국을 대체한 상황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독일제국의 패배와 불평등한 베르사이유조약을 그대로 감내해야 했다. 이 시절에 독일은 서쪽 영토는 프랑스에 동쪽 영토는 신생 폴란드에 내줘야만 했다. 게다가 바이마르공화국은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인류의 경제 사상 그 어느 국가도 경험하지 못했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일례로 1922년 160마르크 하던 빵 가격이 1년 만에 2000억 마르크까지 올랐다. 이로 인한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고통은 심했다. 1920년 중후반 화폐가치가 안정되고 경제도 정상화의 길을 걷는 듯했지만 1929년 세계경제를 강타한 대공황의 충격이 독일에도 닥쳤다. 독일 경제 정상화에 크게 이바지했던 미국의 자본이 급속하게 빠져나감으로써 경제가 급속히 추락했기 때문이다. 총체적 위기의 결과는 1933년 히틀러와 나치 세력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나치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대량 실업을 초래하는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종결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제활동을 조율하고자 했다. 소련이 좌파식 계획경제를 나치 독일은 우파식 계획경제를 통해 자본주의 대안을 보여 준 셈이다. 특히 군인을 동원해 노동력을 충원하고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산업능력을 키움으로써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나치 독일이 국수주의를 고취해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은 이런 정치경제 모델하에서 동반되는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미국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의 결합은 나치즘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1938년 합병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다시 두 나라로 나뉘었고 독일 자체도 서독과 동독으로 양분되었다.
독일이 가장 성공한 시기는 1949년부터 1989년까지로 서독이 일명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때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서독지역은 미국,영국,프랑스가 점령한 곳이었다. 이런 비극적 시기에 경제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시기는 과거 나치 시절의 국가주도가 아닌 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을 따랐다. 거기에 1920년대의 혼란을 경험해서 사회적 시장경제가 정확한 경제 모델이다. 노동 세력의 권리와 사회의 안정도 동시에 추구하는 모델이다. 원칙은 자유시장의 원칙에 따라 경제가 돌아가되 노동자의 권리을 보호하고 복지국가 실현으로 불평등을 축소하는 노력을 동시에 기울인다는 것이다. 노조의 대표가 회사 이사회에 참가하는 제도는 그 상징적 사례다. 서독은 화폐가치의 안정을 최고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서독은 물가는 안정적이었고 여기에 더해 상품의 경쟁력을 높여 수출에 성공하는 선순환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데 기여한 것은 1951년의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프랑스와 합의한 것이다. 이후 1958년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는 민족의 범위를 초월하는 대륙적 시장 형성을 선포했다. 유럽통합은 서독이 정치적 우위를 프랑스에 내주면서도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서독의 경제적 성공은 1990년 독일의 신속한 통일로 정치적 열매를 맺었다. 당시 서독 총리였던 헬무트 콜은 낮은 가치의 동독 마르크화를 높은 가치의 서독 마르크화로 일대일로 환전해주며 동독 주민의 마음을 샀다. 주변국의 위협이 안될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단일화폐인 유로화로 통합하는 안을 수용했다.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 그리고 국가가 다 함께 책임감을 품고 미래지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독일의 자본은 노동세력을 불순한 집단으로 보지 않고 기업을 운영하는 공동의 파트너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협력을 도출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또한 무책임한 요구나 파업을 일삼기보다는 기업의 운명을 함께 일궈나간다는 의식을 갖고 자제력을 발휘하곤 했다. 국가 즉 정치 세력도 자본이나 노동의 어느 한쪽 편에 서기보다는 경제에 필요한 개혁을 주도해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한편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의 고민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다. 1970년대 출산율이 1.5명 이하로 떨어진 뒤 1995년에는 1.25명 수준까지 하락했다. 결국 독일은 1990년대부터 게르만 순혈주의를 포기하고 국적법을 개정해 이민자들의 귀화를 받아들였다. 2015년에는 시리아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 통일 당시 서독과 프랑스 1인당 국민소득은 각각 2.2만달러와 2.1만달러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2017년 통일독일은 4.4만달러로 프랑스는 3.8만달러 수준으로 격차가 벌어진다. 동독의 시민들을 흡수하고 다수의 난민까지 포용했는데도 프랑스보다 높은 국민소득을 달성하며 격차를 벌린 셈이다. 장기 집권한 메르켈 총리는 유럽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제로 군림하면서 유럽연합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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