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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원을 품은 밀림 속 도시 앙코르 와트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4. 11. 26. 03:43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비행기로 50분 걸리는 톤레사프호의 북동쪽에 세계문화유산인 앙코르 와트 유적군이 있다. 이 거대한 앙코르 유적군 중 하나가 바로 캄보디아 국기에도 들어갈 만큼 유명한 앙코르와트다. 앙코르는 앙코르톰을 중심으로 50개가량의 건축물이 늘어선 거대 도시다. 앙코르는 9세기 초에 크메르왕조가 건설했다. 크메르인은 현재의 캄보디아 주변에서 살던 민족으로 6세기에 진랍이라는 국가를 세웠는데 이 무렵에는 베트남 남부에 큰 세력을 떨치던 부남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2세 때 독립을 이뤘고, 현재 앙코르와트에서 북으로 30km 떨어진 프놈쿨렌 언덕을 중심으로 크메르왕조가 수립되었다. 크메르왕조는 대대로 이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당시에는 왕이 새로 즉위하면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크메르왕조는 세습제가 아니라 실력으로 왕위를 쟁취하는 체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왕이 전 왕이 세은 사원에서 의례를 치르는 것을 꺼렸고 그래서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원이 들어섰다. 힌두교를 숭배한 크메르왕조의 왕은 새로운 사원을 건설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과 신앙심 그리고 재력을 과시했다

     

    1113년에 즉위한 수리야바르만 2세는 타이와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하며 크메르왕국의 최대판도를 구축한다. 그는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많은 사원을 세웠다. 이후 크메르왕국은 베트남 중부에서 세력을 키운 참파왕국의 침공을 받고 쇠퇴하였지만 1181년에 즉위한 자야바르만 7세가 다시 전세를 뒤집었다. 그는 앙코르와트의 북쪽에 새로운 도시 앙코르톰을 건설했다. 앙코르는 왕도 톰은 크다라는 의미다. 앙코르톰은 높이 8m, 길이 3km의 성벽으로 도시를 감싸고 주위에는 폭 100m의 해자를 만들어서 왕과 백성을 보호했다. 이곳은 쿨렌산에서 대량의 토사가 흘러들어 오는 선상지로 비옥한 평야가 펼쳐진 지역이었고 그래서 왕조의 수도로 선택되었다. 게다가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일년에 삼모작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건기에는 물이 부족하고 우기에는 홍수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톰의 동서에 저수지를 만들고 용수로와 수로를 정비하였다. 이 저수지 덕분에 주위에는 풍부한 무논이 펼쳐졌고 이곳에서 얻은 높은 식량생산력은 왕권을 뒷받침해 주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힌두교가 아닌 불교를 믿었다. 그래서 앙코르톰에 불교사원이 많이 건설되었으며 힌두교양식과 불교양식이 결합한 독특한 크메르미술도 더욱 발전했다

     

    최고의 번영을 누린 크메르왕조는 계속되는 사원 건설로 재정이 악화된 데다 후계자 다툼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점차 쇠락해갔다. 결국 14세기 후반에 타이의 야유타야왕조가 크메르왕조를 침공했고 앙코르톰이 함락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국가들이 앞다퉈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캄보디아는 기나긴 암흑시대를 맞게 된다. 캄보디아인들은 신앙도 힌두교에서 불교로 특히 남방아시아의 상좌주불교로 옮겨갔기 때문에 앙코르왕트는 불교사원으로서 명맥만 이어갔다. 앙코르는 차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방치되었고 결국 빠르게 성장하는 열대식물로 뒤덮인 밀림 속에 파묻혀 존재조차 잊혔다. 앙코르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60년 프랑스인 박물학자 앙리 무오의 방문 이후다. 그는 일년에 걸친 탐험 끝에 밀림 속에서 잠자던 이 도시를 발견하고 전 세계에 소개했다. 수많은 전당과 탑, 코끼리도 지나갈 수 있는 만큼 널찍한 석조회랑, 정교한 부조 등을 간직한 밀림 속 유적은 신비스러움 자체였다 프랑스령이던 캄보디아는 1953년 독립을 했지만 그 후에 내전에 돌입했다(1967-1975) 정권에서 내몰린 크메르루즈는 앙코르와트를 본거지로 삼고 수많은 지뢰를 묻었다. 누구나 앙코르 와트에 마음 편히 갈 수 있게 된 것은 국제회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내전 종료된 1990년대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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