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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중심이었던 천년의 수도 교토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4. 7. 18. 03:23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교토분지에 위치한 교토의 옛 명칭은 헤이안쿄다. 이도시는 794년에 간무 천황이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탄생했다. 헤이안쿄 이전에는 나라의 헤이조쿄가 수도였다. 헤이조쿄는 덴무 천황계의 혈족을 지지하는 귀족과 기존 불교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물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덴무 천황과 대립하던 덴지 천황계의 혈족, 간무 천황은 784년에 교토 부근의 나카오카쿄로 천도했다. 그런데 천도의 책임자이자 신뢰하던 대신인 후지와라노 다네츠구가 암살당하자 간무 천황은 친동생인 사와라 친왕을 의심하여 아와지로 귀양을 보냈다. 그후 간무 천왕의 생모와 황후 등이 잇따라 병사하고 홍수와 기근에 전염병까지 발생하자, 사람들은 사와라 친왕 원령의 저주 때문에 흉흉한 재해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을 느낀 간무 천황은 천도를 결심했고 그때 선택한 곳이 교토분지다.

     

    헤이안시대 교토

    교토분지이 선택된 이유는 당시 일본일들이 믿던 사신상응의 조건에 합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각 방위에 수호신을 두는 중국사상인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북쪽에 바위(현무) 동쪽에 강(청룡) 남쪽에 큰 연못(주작), 서쪽에 도로(백호)가 있는 형세의 토지를 명당으로 간주한다. 교토분지 일대에는 북쪽에 후나오카산, 동쪽에 가모가와강, 남쪽에 오구리연못, 서쪽에 산인 도로가 위치하고 있다 헤이안쿄는 남북 약 5.3km, 동서 약 4.5km 길이의 직사각형 도시였다. 우선 황궁을 북부 중앙에 배치하고 남쪽으로 쭉 뻗은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사쿄 서쪽에 우쿄를 건설해 같은 규모의 두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헤이조쿄이선례에 따라 헤이안쿄 역시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참고하여 건설했다. 그래서 사쿄를 낙양성 우쿄를 장안성이라고도 불렀다. 사쿄와 우쿄에는 24개의 대로와 48개의 소로가 있다.

     

    헤이안쿄로 천도한 지 100년쯤 지나자 서쪽의 우쿄는 쇠퇴하고 황폐해졌다. 우쿄가 가쓰라가와강 주변 습지대 위에 조성되어 자주 범람하고 온대성 말라리아가 발생한 탓에 사람들이 사쿄로 빠져나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반면 사람들이 몰려든 사쿄는 번창했다. 사쿄는 가모가와강 너머 동쪽으로 확장했다. 새로운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귀족과 관인의 저택들이 지어졌다. 무가가 대두한 헤이안시대 말기에는 다이라라는 성을 가진 일족이 이곳에 저택을 짓고 본거지로 삼았다. 가마쿠라시대에 이르러 수도의 중심이 아예 사쿄(낙양성)로 옮겨지고 도시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헤이안쿄라는 호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도심 안에 사원 건립이 허가되었기 때문에 무로마치시대에는 선종을 비롯해 나치렌종과 같은 신흥종파의 절들도 건립되었다.

     

    1336년에 시작된 무로마치막부는 3대 쇼군이 아시카가 요시아키에 이르러 정권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자 상공업자들이 마치 소로에 점포를 차리기 시작했고 15세기에 이르러 교토는 상업도시의 일면도 갖게 되었다 인구가 증가한 교토에서는 도시 재편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6세기에 나조 대로를 경계로 해서 북으로 가미교, 남으로 시모교라는 두 개의 커다란 공동체가 생겼다. 이대로 교토는 계속 발전해 나가는 듯했지만 1467년에 유력 다이묘와 막부 쇼군 사이에 벌어진 정쟁을 계기로 오닌의 난이 일어났다. 10년 이상 계속된 이 내란으로 귀족과 조정관료, 무가의 집들이 몰려 있는 가미교는 폐허가 되었고 1003만호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상공업자가 많은 시모교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니조성

    일본 통일을 꿈꾸던 영주(다이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쓰러진 후 그를 모시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0년에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그 뒤 도요토미는 황폐해진 교토를 대대적으로 부흥시켰다. 교토의 구획은 바둑판과 같은 정사각형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때 구획을 분할하면서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 구획이 만들어졌다. 정권을 장악한 에도막부는 교토에 니조성을 쌓고 막부의 직할지로 삼아 산업을 보호했다. 고급비단인 니시진오리 산업을 극진히 보호한 것이 교토 진흥의 핵심이었다. 교토의 거상인 스미노쿠라 료이는 고토와 후시미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었는데 이 덕분에 오사카부터 요도가와강을 경유해서 물자를 교토 시내로 실어올 수 있게 되었다 . 따라서 교토는 인구가 35만명까지 증가하여 에도, 오사카의 뒤를 잇는 도시로 발전했다

     

    교토어소

    막부시대 말기의 교토는 개국을 추진하는 막부와 존황양이파 조슈번의 여러 무사 및 지사의 격전지가 디어 치안이 악화되었다. 1864년에는 막부군과 조슈번의 군이 교토 황궁 부근에서 충돌한 금문의 번이 발생하기도 했다. 1867년 에도막부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에도막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 신정부군과 구막부군이 교토 교외에서 충돌하며 보신전쟁의 서막을 여는 도바 후시미 전투가 벌어졌다. 보신전쟁은 왕정복고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와 옛 막부세력 간에 벌어진 내전이다. 보신전쟁에서 승리하고 에도성에 무혈입성한 메이지 정부의 수뇌부는 수도 이전 논의를 본격화했다. 결국 에도막부 시대의 관청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해서 에도(도쿄)를 수도로 선택했다. 1868년에 마침내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후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온 일본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교토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모면하여 천년의 수도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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