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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대해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4. 5. 21. 03:36

    바그다드

     

    티그리스강을 따라 펼쳐진 이라크 평원의 중앙에 위치한 바그다드는 고대 바빌로니아왕국의 수도 바빌론에서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라크의 대부분 지역은 여름 기온이 섭씨 50도에 가까운 사막기후지만, 바그다드를 포함한 티그리스 강가는 고대에 사와드라고 불렸던 비옥한 충적평야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목이나 상업활동에 종사한 아랍인이 기원전 8세기경부터 집락을 형성했고 그 이후 바그다드는 3-7세기에 중동을 지배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농산물 집적지가 되었다. 바그다드는 당시 페르시아어로 신에 의해 건설된 도시를 의미한다.

     

    610년 아랍족 출신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자 이슬람교단 조직이 사산왕조를 대신해서 아라비아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는 합의로 선출했다. 5대 칼리프 무아위야 일족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우마이야왕조를 세웠다. 한편 4대 칼리프인 알리 일족을 지지하는 세력은 시아파라 불리며 다수파인 수니파와 대립하게 된다. 우마이야왕조에서는 아랍족이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반발이 거세졌다. 결국 750년에 우마이야왕조는 아불 아바스에 의해 무너지고 아바스왕조가 탄생했다. 아바스왕조는 당초 유프라테스 강가에 위치한 쿠파를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같은 땅을 거점으로 한 시아파세력과 정쟁이 발생하자 아바스왕조 2대 칼리프인 만수르는 천도를 결심했다. 만수르는 여러 후보지 중에서 티그리스강을 끼고 있는 바그다드를 선택했다. 하천을 통한 물적 유통이 편리한 데다 군사 주둔지로서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762년에 시작됐는데 모두 약 10만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767년에 5년에 걸쳐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고 바그다드는 평안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 도시는 삼중으로 되어 원형 성벽으로 에워쌌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했는데 아무래도 구워서 굳힌 소성벽돌보다 내구성이 낮은 탓인지 현재 성벽은 잔해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슬람국가의 도시들은 육각형 또는 팔각형 구조가 많다. 그런데 바그다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를 본떠 원형 성곽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할 때도 페르시아 건축기사를 참여시켜 왕궁의 중정 배치 등에 페르시아의 건축양식이 반영되도록 했다. 중앙광장에는 궁전과 모스크를 건축했는데 궁전은 천구를 본뜬 녹색 돔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슬람 도시에는 중앙에 모스크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시장이 펼쳐지도록 하는 구조가 일반적인 형식이 된다 하지만 바그다드에서는 치안 유지를 고려해서 시장이나 서민의 주거지는 성벽 밖에 만들고 성의 내부에는 왕족이나 고위 군인만 거주했다

     

    원형 성곽 도시는 중앙광장에서부터 네 군데로 뻗은 큰길에 의해 4등분되었다. 동북쪽의 호라산 문은 페르시아나 중국대륙으로 동남쪽의 바스라문은 티그리스강을 경유해서 인도양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서북쪽의 시리아문은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나 북아프리카로, 서남쪽의 쿠파 문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로 이어졌다. 아바스왕조는 시가지의 바깥을 에워싸듯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잇는 운하들을 만들어 선박을 이용한 물자 이송이나 농업용수로 활용했다. 중세의 바그다드는 서양의 동로마제국과 동양의 당나라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이 도시는 이른바 세계의 십자로라 불리며 수많은 상인과 물자가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했다. 아바스왕조는 상업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세를 징수하지 않았다. 바그다드는 아랍인을 비롯해 유대인, 페르시아인,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등 여러 인종과 민족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다.

     

    아바스왕조
    지혜의 전당

    만수르는 영토 내의 주요도시를 파발형식의 연락망으로 묶어 각지의 사정을 칼리프에게 전하는 정보 전달망을 구축했다. 이로 인해 바그다드는 중동, 지중해 연안, 아시아 각국의 동향이나 풍속 및 전승 등 온갖 정보가 한데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786년에는 아바스왕조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즉위하여 왕조의 최정성기를 이끌었다. 당시 바그다드의 인구는 200만에 달했는데 같은 시기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약 30만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바그다드는 당나라의 장안과 함께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신체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을 의무화했는데 목욕탕이 있는 주택이 많지 않아 대도시의 공중목욕탕이 시민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그 당시 3만개나 되었다고 한다. 하룬은 문화와 예술에도 힘써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천문학, 수학, 건축학, 철학, 의학 등 동로마제국의 문헌을 수집해서 바그다드에 대규모 도서관을 세웠다. 나중에 지혜의 전당이라 불렸다. 중동 각지의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점점 쇠퇴하던 아바스왕조는 1258년에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았고 이때 바그다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16세기에는 투르크계 오스만왕조가 중동 이슬람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어 바그다드를 재건했다. 19세기말 중동에서 세력 확대를 도모하는 영국에 대항하여 독일은 자국과 페르시아만을 연결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바그다드를 주목했다. 그리고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잇는 바그다드 철도 부설을 계획했다.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건설하던 중인 191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이라크의 아랍족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할 뜻을 굳히고 1921년에 바그다드를 수로로 하는 이라크왕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영국을 추종하는 왕실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거세져 1958년에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왕정이 무너지고 이라크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바그다드는 2003년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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