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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년의 역사를 품은 지중해의 십자로인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 대해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 도시 2025. 1. 9. 03:00
아프리카대륙을 대표하는 지중해의 도시 튀니스를 빼놓을 수 없다. 튀니스는 튀니지의 수도이다. 튀니지는 2011년에 북아프리카와 아랍권 국가를 휩쓴 혁명운동 아랍의 봄으로 맨 처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나라이다. 인접한 알제리나 모로코와 마찬가지로 튀니지는 내륙에 사하라사막이 펼쳐져 있지만 연안지역은 녹지가 풍부하다. 또 연간 평균기온이 섭씨 24도 정도의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다. 폭 약 64km의 튀니스만은 자연이 만든 훌륭한 항구다. 튀니스 도심은 만 안쪽에 있으며 제방으로 바닷물을 막는 튀니스호를 접하고 있다. 튀니스와 시칠리섬은 겨우 120km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다. 고대 튀니지 일대에는 선주민인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차츰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페니키아인은 현재의 시리아-레바논 주변 출신으로 일찌감치 지중해에 교역망을 넓히며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연안 곳곳에 통상 거점이 되는 도시국가들을 건설했다. 기원전 814년 레바논의 티루스에서 온 페니키아인 공주디도가 현재의 튀니스 북부에 도시국가 카르트 하다쉬트를 건설했다. 그 이름은 새로운 도시를 의미했다. 하지만 라틴어로는 카르타고, 페니키아어는 포에니라고 불렸다. 카르타고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해양국가로서 크게 발전하여 주변의 시칠리아섬, 코르시카섬, 샤르데냐섬은 물론 지중해 각지에 위성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과일, 목재, 상아 등을 팔거나, 이베리아반도의 금, 은, 동 등 금속을 동방으로 수출해서 커다란 이익을 올렸다. 기원전 5세기경에 이미 카르타고 시내에는 구획된 도로가 건설되어 있었다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 위성도시를 건설한 그리스인과 자주 부딪혔다. 페니키아인 중에는 그리스문화를 받아들여 기원전 4세기에 철학자 플라톤이 아테네 북쪽에 세운 교육기관인 아카데메이아에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로마공화정은 처음에 카르타고와 우호관계를 맺었지만 점차 지중해 재해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되었다. 기원전 264년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1차 포에니전쟁이 벌어져 카르타고가 로마에 시칠리아섬을 빼앗긴다. 기원전 218년에 발생한 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나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를 침공했다. 이때 로마군은 이탈리아 남부 칸나에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하지만 그 틈에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이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카르타고는 곧 상황을 수습했지만 기원전 149년에 시작된 3차 전쟁에서 로마군에 완전히 정복당하고 만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한 뒤 속주로 만들어 곡창지대로 개척했다. 이후 카르타고에서는 포도와 올리브가 풍성하게 재배되고 대규모 공중목욕탕과 원형극장이 세워졌다. 카르타고로 이주한 로마인도 많았고 기원후 4-5세기에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국론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그리스도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카르타고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이후 카르타고는 439년에 게르만계 반달족에 점령당해 반달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여러 차례 로마인과 전투를 치르며 전화에 휩싸였다. 6세기에는 동로마제국이 반달왕국을 무너뜨리고 카르타고를 지배했다
지투나 모스크 698년에는 이슬람의 우마이야왕조가 북아프리카를 정복했다. 우마이야왕조는 중심지를 카르타고에서 현재의 튀니스로 옮겨 이집트 출신 그리스도교를 이주시켰다. 이때 구축한 시가지가 현재 튀니스시 서남부의 메디나 구역이다. 732년에 튀니스의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물 지투나 모스크가 완공되었는데 이때 사용된 184개의 기둥은 카르타고 유적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후 북아프리카에서는 아바스왕조에서 독립한 파타마왕조 등 여러 이슬람 왕조가 등장해 흥망을 거듭했다. 그동안에도 튀니스는 지중해 무역의 거점으로서 번성했으며 아랍 상인뿐 아니라 전쟁포로가 된 유럽인, 동방에서 온 페르시아, 유대인, 아프리카 내륙 출신 흑인 등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드나드는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11-12세기엔은 튀니지를 지배한 유력한 왕조가 없었다. 그래서 튀니스는 일시적으로 베네치아나 피렌체처럼 거상, 직공의 수장, 무역선의 선주 등 힘을 가진 시민들이 자치체계를 구성해 도시를 운영했다. 14세기에 튀니스의 인구는 약 3만명 정도였다. 이 무렵에는 중세 이슬람세계를 대표하는 역사가 이븐 할둔이 등장한다. 그는 폭넓은 시야로 아랍세계와 이슬람 문명을 총체적으로 고찰한 역사 철학서 역사서설을 집필했다
튀니지는 1574년에 오스만제국의 속주가 되었는데, 이를 전후한 시기에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된 이슬람인이 튀니스로 대거 들어왔다.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튀니스는 지중해 각지와 깊은 교류를 지속했다. 튀니스를 통치하던 지방장관이 저택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과 스페인 안달루시아산 타일들로 꾸며졌다. 19세기에 접어들며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점차 유럽 열강에게 잠식당했고 튀니지는 1883년에 프랑스 보호령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튀니스의 인구는 약 12만명에 달했다. 프랑스인들은 도심의 동쪽지역인 튀니스호 일대를 개발했다. 우선 튀니스의 구시가지를 에워싼 성벽을 헐고 비슷한 신시가지를 건설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1930년대 전후 튀니스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당시에 유행하던 아르데코양식이 반영된 개성적인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튀니지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지만 유럽과는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외국문화에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는 이 도시는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튀니스는 국가의 독립과 동시에 수도가 되었고 카르타고 유적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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