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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 이전의 종이인 파피루스로 문명을 담았다
    아들을 위한 인문학/일반상식 2024. 7. 4. 03:04

    지중해 세계에서 파피루스는 주로 이집트 북부의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재배되었다. 원래 파피루스는 무덥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식물로 나일강 삼각주 지역은 그 조건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집트는 파피루스를 재배했는데 기원전 4천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파피루스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우선 글씨를 쓰는 종이로 사용했다. 그 만드는 방법을 보면 파피루스의 외피를 제거하고 끈적끈적한 섬유질 내부 속을 약 40센티미터 길이의 얇은 세로로 자른다. 자른 파피루스의 가장자리가 약간 겹치도록 단단한 표면에 나란히 놓고 다른 파피루스의 잘린 조각을 직각으로 맨 위에 놓는다. 이런 파피루스의 자른 조각들을 망치로 내리쳐 으깬 다음 무거운 도구로 눌러 말린 뒤에 돌이나 조개 및 둥근 나무로 계속 문질러 파피루스 조각들이 서로 달라붙도록 한다. 파피루스는 건조한 기후에 놓아두면 부패에 강한 셀룰로오스 성분이 형성되어 오래 갈 수 있다. 파피루스는 습기에 노출되면 곰팡이가 생겨 부서질 수 있어서 한번 만들고 나면 나무 상자 속에 넣어 잘 보관해야 한다. 파피루스는 여러 품질과 가격으로 만들어졌는데 기준의 파피루스의 표면이 얼마나 매끄럽고 하얗고 단단한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래야 파피루스에 글씨를 쓰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물건을 감싸는 포장지로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2012년 홍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의 항구 도시 와디 알자프에서 발굴되었는데 만들어진 연대는 기원전 2560년이었다. 역사학에서 문자를 써서 기록으로 남기는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국가를 만들었다고 인정한다고 했다. 그런면에서 고대 이집트가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파피루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파피루스 대신에 현재 이라크의 수메르와 바빌론 문명에서는 진흙을 불에 구운 점토판에 글씨를 썼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밀랍을 입힌 나무판 위에 쇠로 만든 펜으로 글씨를 썼다 파피루스는 종이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개의 파피루스 줄기를 단단히 묶으면 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타고 나일강을 자유롭게 오가는 일이 가능했다. 이집트는 나일강 부근을 제외하면 국토 대부분이 사막이어서 육상교통이 불편한데 이집트인들은 그런 지리적 특성을 잘 활용해 파피루스 배를 타고 나일강을 오가면서 사람과 물자들을 실어 날랐다. 그 밖에도 파피루스는 물건을 묶는 밧줄, 신고 다니는 샌들, 바구니, 집의 지붕과 천장과 울타리 등을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다. 파피루스의 어린 가지나 새순은 먹을 수 있었다.

     

    양피지

    파피루스를 여러 용도로 사용하다 보니 이 파피루스를 파는 상인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고대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서기 273년에 이집트의 파피루스 상인이 파피루스 판매로 벌어들인 돈으로 자기 집에 정사각형 유리 패널을 설치하고 거대한 도서관을 소유하였다고 한다. 한편 파피루스의 단점은 현대의 종이와 달리 결이 부드럽지 않고 매우 뻣뻣해 접기가 어려웠으며 많은 분량의 글자를 적기에 불편했다. 또한 습기에 노출되면 파괴되기 쉬웠고 무엇보다 완벽한 품질이 아니면 표면이 울퉁불퉁해 글씨를 제대로 쓰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파피루스는 무덥고 습한 열대 기후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건조하고 서늘한 지역에서는 파피루스를 재배해 만들기가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위도가 높은 서유럽과 북유럽 지역에서는 파피루스 대신 양가죽을 벗기고 가공해 만든 종이인 양피지를 필기도구로 사용했다. 양피지는 질기고 튼튼하고 게다가 양피지는 글씨를 다 쓰고 나면, 그것을 날카로운 금속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러 없엔 다음 그 위에 다시 글씨를 쓰는 식으로 재활용할 수 있었다. 서기 1세기 무렵에 글씨를 쓰는 도구 분야에서 양피지는 파피루스의 중요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사자의 서(파피루스)
    papyrus에서 paper로 단어변환

    양피지도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만드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양피지를 만들려면 최소한 양을 한 마리 죽여 그 가죽을 벗겨야 하는데 그런 양피지를 모은 책을 만들려면 양을 적어도 20마리 이상은 죽여야 그 정도의 가죽을 모을 수 있었다. 양피지 책의 가격은 어마어마했고 웬만한 부유한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 서민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종이와 인쇄술이 일반화되는 16세기 이전까지 책은 필수품이 아니라 부유한 엘리트를 위한 사치품이었다. 751년 이슬람제국 군대의 장군인 이븐 살리흐가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은 중국 당나라 군대의 종이 기술자들에게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아랍인들이 제지소를 세우고 종이를 만들어냄으로써 이후 파피루스가 사장되었다고 알려졌다. 아랍지역에서 파피루스가 종이로 완전히 대체된 때는 1087년이었다. 유럽에는 서기 900년에 들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던 스페인에 종이가 전해졌고 그보다 늦은 1000년대 무렵에 스페인을 통해 서유럽에도 종이가 전해졌다. 다만 남유럽의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아 지역이 무덥고 습해 파피루스의 재배가 있어서 교황청에서 파피루스를 필기도구로 사용했다. 이렇듯 파피루스는 1100년대 이후로 종이에 밀려 더는 필기도구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종이가 들어오기 전까지 3천년 넘게 필기도구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신화와 종교의 내용을 적은 사자의 서, 이집트 의학과 수학을 기록한 저서 등이 있다. 한편 종이의 paperpapyrus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종이에 밀려 사라졌어도 파피루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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