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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경제의 문을 연 영국은 어떻게 세계를 재패하고 물러났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2023. 5. 16. 03:04

    < 영국 경제의 기반이 된 해적 행위 >

    영국은 빨리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었다고 하나 그 이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세계 도처에 거느리고 있었던 식민지 대부분을 가로챘다. 그렇게 해서 축적된 자본이 있었기에 산업혁명이 가능했다. 그리고 무적함대를 능가하는 해군력은 거국적인 해적 행위가 그 비결이었다. 영국은 대항해시대에 뒤쳐진 후발주자였고 그 시대의 주역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였다. 영국이 해양에 디뎠을 때는 이미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의 중요 지역이 모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점령당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국 해적이 두각을 나타냈다. 우수한 조직력을 갖춘 선단과 뛰어난 항해술을 무기로 삼은 영국 해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수송선을 잇달아 습격하여 재화와 보물을 강탈했다. 이 해적 선단을 눈여겨본 영국 왕실은 왕실이 건조한 배를 해적들에게 선사하며 국가사업으로 해적 항해를 시작했다. 그 중 으뜸인 것이 해적 드레이크의 항해다 그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해군 제독이다. 그는 해적에서 해군 제독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해적 드레이크에 힘입어 7대양의 대영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산업혁명은 동력화한 공장으로 면과 석탄 등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져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중앙은행격인 잉글랜드은행이 군사 강국으로 도약 발판 >

    영국은 원시적 야만적인 해적 행위로 돈을 벌어들였지만 국가의 경제시스템은 근대적 합리적 제도를 갖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세와 은행이다. 영국 중세에도 국왕이 임의로 조세를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가 있었다. 그 이유는 존 국왕은 프랑스와 전쟁에 번번히 패하고 세금을 낭비하자 영국의 시민들과 귀족들이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자 존 국왕은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임의로 조세 징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나온 문서이다. 그리고 영국은 근대적인 은행을 일찍감치 설립하여 국가 재정 및 금융을 안정시켰다. 1693년에는 국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처음으로 국왕이 빚을 지는 일은 자주 있으나 국채라는 정식 금융채를 발행한 것이다. 나아가 영국은 1694년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한다. 이는 영국 정부의 국채를 끌어안은 대신 같은 액수의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를 가졌다. 즉 영국정부에 돈을 빌려주기 위해 세워진 은행인 것이다. 그때까지 영국 정부는 민간 자본가에게 돈을 빌렸으나 안정적인 차입이 불가능한 데다 높은 이자도 내야 했다. 창구를 단일화하여 낮은 이자로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전비에서 낮은 이자로 빚을 지므로 영국의 군사력 강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아편전쟁

    < 막강한 군사력이 곧 경제력으로 대영제국이 가능 >

    영국의 경제 패권은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성립될 수 있었다. 영국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둘 수 있게 한 것은 군사력이었고 영국은 상거래시 자국이 불리해지면 종종 군사력을 이용하기도 했다. 1840년 아편전쟁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군사력을 앞세워 중국을 강제로 굴복시켰고 아편 밀매를 묵인하게 했을 뿐 아니라 홍콩을 할양받고 상해에서 권익을 챙기는 등의 결과물을 얻었다. 특히 영국은 해군력으로 전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해당 지역의 교통과 유통을 손에 넣어 무역을 독차지하고 세계 식민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미사일이나 전투기가 없는 시기로 해군이 보유한 함선의 크기와 수로 그 힘이 판가름 한 것이다. 그 당시 영국 해군은 2국표준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2위와 3위 국가가 힘을 합쳐 대항해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해군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 파운드가 기축통화가 되어 세계 최초의 금융제국 탄생 >

    사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었던 기간은 이외로 짧다. 영국은 공업 생산 면에서 19세기 후반에는 미국에 뒤처졌으며 20세기 초에는 독일에 밀렸다. 그러나 공업 생산 강국에서 밀려난 후에도 영국은 계속해서 세계경제의 패자로 군림한 이유는 세계 금융의 중심은 여전히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금융 시스템이 가장 발달한 국가로 1816년 영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했고 1821년 전 세계를 상대로 파운드와 금의 자유로운 태환 즉 교환을 보증했다 그래서 영국은 1913년까지 영국의 물가지수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고 한다 영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한 이후 대단히 안정적 금융을 구축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도 영국을 따라 금본위제를 선택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영국 파운드가 국제무역의 기축통화로 등극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은 세계무역의 20% 안팎을 단독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 파운드를 국제적으로 사용하기 용이한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 당시 국제 무역의 주요 상품은 면제품이었고 면제품의 원료가 되는 목화는 이집트, 인도, 미국에서 런던으로 집결되었으며 전 세계의 구매자들 또한 런던으로 모여들었다. 게다가 영국은 목화를 제품화한 면제품으로도 세계 최대의 시장점유율을 지닌 국가였다. 영국은 이렇게 해서 모인 돈으로 다른 나라의 국채를 사기도 하면서 금융시장의 발달을 가져왔다. 특히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주를 사들일 때에 그리고 뉴멕시코를 사들일 때에 국채를 인수했다. 대륙철도를 건설할 때도 영국은행들은 미국 국채를 인수했다 즉 영국은 미국의 국가 주주였던 셈이다. 영국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투자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전비를 조달할 때도 런던의 금융시장을 이용했다

     

    < 1차 세계대전이 불러운 영국의 경제 위기 >

    영국의 본토가 전쟁터가 되는 일은 없었지만 독일의 잠수함 때문에 해상이 봉쇄당하여 경제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입었다. 영국은 섬나라인 까닭에 해상무역을 통해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국가다. 수출입이 불가능해지면 대영제국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영국은 섬유제품이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봉쇄로 인해 영국의 시장점유율은 그 절반에 가까웠다. 그 공백을 일본이 차지했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수출량을 세배로 급격히 증가시켰는데 주된 수출품이 섬유제품이었다. 또한 영국은 원료나 식량의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했는데 해상 봉쇄로 국내로 들여오지 못하고 있어 국가가 파탄날 지경이었다. 전쟁 말기에 미국이 참전하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이 끝난 이후 영국이 미국의 압도적 채권국이었다가 미국이 영국의 압도적인 채권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제 영국의 경제 패권은 영국의 지배에 복종하는 위치에 있었던 미국에 위협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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