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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왕산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기도 한 힘들고 고된 나무꾼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3. 4. 3. 03:39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취사와 난방을 위한 연료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나무뿐이었다. 나무꾼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직업이다. 고려시대에는 전업 나무꾼이 없고 어린이나 젊은이가 틈나는 대로 도성 밖의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도성과 그 주변 4km까지 벌목을 금지했다. 새벽에 출발해서 저녁에 돌아오니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은 할 수가 없다. 도성 사람들은 나무를 시장에서 사다 쓸 수 밖에 없었고 나무꾼은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도성 근처가 아니라고 아무 데서나 나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곳곳이 국유림이다. 왕릉의 나무라도 베었다가는 사형이다. 사대부의 선산은 양반과 노비가 직접 순찰을 하여 나무꾼을 발견하면 도끼를 빼앗고 했다. 나무꾼은 깊은 산속으로 내몰렸다

     

    인적 드문 산속을 드나들어야 하는 만큼 나무꾼은 위험한 직업이었다. 가장 흔히 마주치는 위험은 호랑이다. 인왕산에 들어간 나무꾼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일도 벌어졌다. 짐승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이어서 나무꾼 아이가 소에 나무를 싣고 팔러 가다가 도적을 만나 소를 뺴앗기고 살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국경지대는 숲이 울창하지만 청나라 사람들이 나무꾼을 납치하여 국경을 넘었다는 빌미로 몸값을 요구하곤 했다. 한편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니 잔가지를 줍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무꾼이 사용한 도구는 도끼보다는 낫이나 갈퀴였다. 떌감으로 쓴다면 굳이 굵은 나무를 벨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동법으로 유명한 김육은 나무꾼 출신이다. 매일 나무를 해서 서울에 내다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 틈틈이 책을 읽어 과거에 합격했다.

     

    한양에서 소비되는 땔나무의 양은 엄청났다. 나무꾼이 등에 짊어지고 오는 정도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나르는 방법을 고안했다. 대량의 화물을 운반하려면 배가 최고다. 땔나무를 수송하는 선박을 시선이라 한다. 수 많은 시선이 한강을 오르내렸다. 정약용이 어느날 충주로 가는 뱃길에서 강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산을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땔감을 가득실은 시선이었다. 서울에는 땔나무 시장이 많았다. 용산이 가장 컸고 서강, 마포, 서빙고, 뚝섬, 두모포 등에도 있었다. 모두 한강 근처의 나루다 한편 나무하는 일만 하는 노비를 초노라고 했고 주로 어린 노비가 담당했다. 경북 예천의 선비 황용한은 나무하는 아이종을 두었다. 눈이 내리던 11월 어느날 아이종이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땔감이 없으니 밥도 못 짓고 온돌도 덥히지 못한다. 아이종이 나타나자 엄청 꾸짖자 아이는 입을 연다

     

    제가 주인어른께 의지한 뒤로

    고생만 했지 받은 은혜 없지요

    풍년이 들어 쌀이 흙처럼 흔해도

    나는 항상 쭉정이만 먹었고

    더구나 솜옷을 화려하지 않아

    내옷은 겨우 정강이를 덮었지요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나무하는데

    나무른 먼 산 기슭에 있지요

    간신히 작은 어깨에 둘러메니

    어깨가 말라서 멍이 들려 하지요

    그런데도 꾸짖음 면치 못하니

    나는 걱정스러워 죽겠습니다

    제가 누구를 믿겠습니까

    듣자니 서울의 대갓집에는

    하인도 고운 비단옷 입고

    서쪽 마을 부잣집은

    일꾼에게 쌀밥과 고기 먹인다네요

    이제 이곳을 버리고 떠나리니

    짚신 한 컬레 준비하겠습니다

    새는 나무를 가려 앉고

    선비는 자리를 가리를 줄 알지요

     

    황용한은 후회했다. 내가 가난한 처지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따뜻하고 배 부르려는 욕심에 아이종을 학대했구나. 이처럼 나무꾼의 삶은 고되었지만 고된 가운데 여유가 있었던 탓인지 나무꾼은 은자의 상징이었다. 박세당은 나무꾼이 되어 여생을 마치겠다며 호를 서계초수라고 지었다. 수락산 계곡의 나무꾼 노인이라는 뜻이다. 정약용도 한강의 나무꾼이라는 뜻의 열초라는 호를 쓰곤 했다. 나무꾼 은자는 이만부 송충의전에도 나오는데 송충의는 서대문 밖에 살았다. 새벽마다 수십리 떨어진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한양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는 아침 저녁 두끼를 마련할 돈만 벌면 만족했다. 굳이 제값을 받으려 하지 않고 헐값에 넘겼다. 남은 돈은 거지에게 주었다. 그는 끼니만 해결하면 남은 것은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무꾼이라는 하잖은 직업을 그는 천직으로 여기고 감사하고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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