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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와 영국은 영원한 앙숙이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1. 3. 15. 04:45

    중세사회는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전쟁을 통해서 전리품을 얻어가거나 왕가의 결혼으로 공주의 지참금으로 영토를 왕이 될 왕자에게 주는 식으로 정치적 결혼제도가 있어 중세유럽사회는 이러한 복잡한 구도로 엮여있다. 여기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어떠한 대립을 하며 왕가를 이루어지를 보면 중세유럽사회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숙명의 적으로 대립하는 시기인 9세기 노르만족인 바이킹이 프랑스에 침입하자 911년에 센강 근처에 노르망디를 주었는데 거기에서 발전한 공국의 후손인 윌리엄이 영국에 침입하여 1066년 노르만왕조를 영국에 건립하였다. 영국와 프랑스의 거대한 전쟁인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왕위계승에 대한 문제로 발단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이권다툼이 내면에 있었다. 프랑스의 샤를4세가 후계자가 없이 죽자 이에 대해 4촌인 필리프6세가 승계하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3세는 샤를4세의 여동생이 어머니이기 때문에 왕위는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필리프6세는 여성왕위 계승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맞섰다. 잉글랜드와 앙숙인 필리프6세는 잉글랜드가 브리튼 섬을 통일하려는 것에 대해 프랑스는 스코틀랜드를 도와주자 잉글랜드가 양모공급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안에 있는 영국영토로 포도주 생산으로 유명한 기옌지방을 영국이 몰수하였다. 한편 1337년 영국의 에드워드3세는 왕위계승 주장으로 백년전쟁을 일으키자 초반에는 영국 활인 장궁이 프랑스 석궁보다 3배 멀리 나가고 갑옷도 뚫는 무서운 무기로 프랑스를 이겨 파리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전쟁사이에도 흑사병이 돌아 유럽인구의 30%가 죽었고 백년전쟁중에 영국의 약탈이 심했으며 농민의 피폐가 심해서 농민반란인 자크리난도 발생하기도 하였다. 1429년에 신의 계시를 받은 17세 프랑스 소녀 잔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샤를왕자를 찾아가 군대를 요청하고 오를레앙을 구하여 프랑스군대의 영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결국에는 영국에 잡혀 마녀로 심판을 받고 19세 나이에 화형되었다. 그런데 프랑스대혁명이후 그녀는 노트르담대성당에서 명예회복되어 프랑스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다.백년전쟁이후 프랑스 양모옷 공급지역인 플랑드르 장인들이 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영국이 모직물 발전의 계기되었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주요 영지를 상실하고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귀족들의 불만이 생겨 영국내부에서 내전이 발생하였다. 가문의 문장을 나타내는 장미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존왕의 대헌장이후 귀족의회에 굴복하다가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귀족의 반이상이 죽은 상황에서 절대왕정시대인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1세가 재등장하였다. 그리고 다시 영국귀족의 세력이 제임스1세이후 영국의회혁명이 이루어졌다. 영국과 프랑스의 앙숙은 이후 1757년 인도의 플라시전투에서 맞서고 아프리카에서도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에 맞서다가 수단파쇼다사건이 일어났다. 미국독립전쟁에서도 미국을 도운 프랑스 루이16세가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맞서다가 독일이 급부상하여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양국은 연합국을 형성하여 앙숙은 풀렸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미중 무역전쟁이 있지만 예전에는 미국이 중국 등소평때 핑퐁외교로 중국에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영원한 우방과 적은 없고 항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엄연한 현실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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