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 1 ) 전 세계와 기싸움을 벌이며 신의 과업을 수행 중인 이란에 대해서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1. 17. 03:48
이란 사람들은 훌륭한 빵들을 만들어 왔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밀가루로 만든 바삭바삭한 난 에 바르바리라는 것인데 바닷소금으로 간을 하고 참깨와 양귀비씨를 뿌려서 주로 아침에 먹는 빵이다. 모양은 대체로 기다란 타원형이고 안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평행선 몇 개가 그어져 있다. 이란은 이 빵의 외관이 자신들 나라의 모양과 닮았다고 한다. 이란은 두가지 지리적 특징이 있다. 하나는 국경지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딱딱한 빵의 가장자리 같은 형태의 산맥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하듯 달리는 저지대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내륙의 평평한 소금사막이다. 산맥은 이란을 일종의 요새로 만들어 준다. 산악지대가 카르비 사막과 루트 사막이라는 내륙 황무지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카르비 사막은 거대한 소금사막으로 알려져 있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친 넓이에 버금가는 이 사막은 길이가 800km이고 너비가 320km에 달한다.
< 적의 침공이 어렵고 국민통합도 어려운 지형 >
이땅은 페르시아로 알려졌다. 이란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35년부터인데 인구의 40%가량을 차지하는 비페르시아계 소수 민족을 고려해서다. 이 나라 국경은 호르무즈 해협을 따라 해안에서 시작되는 1500km길이의 자그로스 산맥이 있다. 그에 이어져 엘부르즈 산맥이 있어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을 이루고 남쪽으로 가면 카스피해를 본다. 이란을 침공하고 싶다면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 습지대에 가서 싸워야 한다. 이 나라 지형은 미래의 침략자에게는 엄청난 장애물이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 대왕은 이곳에 비잔틴 제국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323년 그가 사망하고 페르시아는 다시 지배권을 찾았다. 1200년에는 몽골족이 수십만명의 학살하였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1500년대 오스만 투르크도 자그로스 산맥을 넘는 모험을 감행하였지만 그들도 잠시였고 러시아와 영국도 잠시 머물렀다. 한편이란 사람들은 대다수 여러 소수민족들으로 산악지대에 몰려 살고 있다 도로도 절반 정도만 포장되어 있다. 페르시아어는 이란 국민의 60%만 사용하고 있고 쿠르드족,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등 소수민족은 고유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쿠르드족 등 큰 집단에 대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과 억압적인 통치를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란은 고질적인 물 부족은 이란의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국토의 1/10정도만 경작지로 쓸 수 있다. 강도 3개 밖에 없고 선박이 운항할 수 있는 곳도 하나라 해외무역에서 항공비중이 높다.
< 양날의 검인 호르무즈 해협 >
이란이 세계에서 4번째로 원유 매장량이 많고 천연가스도 2번째로 많다. 하지만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정유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현재는 복구된 상태이다. 이란의 에너지 산업은 비효율적이라고 하는데 국제적인 경제제재로 첨단 기자재를 들여오기가 어려워진 현실 등이다. 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 상품은 에너지이다. 한편 호르무즈 해협은 양날의 검처럼 대양으로 진출하기가 어렵게 좁은 해협이어서 해양의 패권을 쥐어본 적이 없다는 것인 반면 이 좁은 폭은 이란이 다른 모든 국가에게 그곳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원유 공급량의 1/5이 이곳을 통과한다고 할 때 이 해협의 봉쇄는 전 세계의 고통을 몰아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란 정권은 그것을 비장의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이란군은 고속 공격정 수십 척을 동원해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형 선박을 공격하는 훈련을 자주 실행하고 있다. 대함유도탄을 탑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아랍에미레이트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송에도 막대한 차질을 일으켜 에너지 위기를 막기도 한다. 이에 대처하여 걸프 국가들은 원유와 가스파이프 라인을 홍해로 향하게끔 설치해서 그곳에서 유조선들이 인도양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란이 예멘에 있는 후티(시아파 무장단체)동맹에게 제공한 미사일 공격의 목표가 되는 것만큼은 피하자는 것이다
< 페르시아 제국에서 시아파 이슬람 국가가 되기까지 >
페르시아의 기원은 4천년 전으로 올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에게 시작된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뿌리를 비슷한 메디아 사람들과 멀지 않은 자그로스 산맥 주변에 자리 잡았다. 기원전 550년에 페르시아 통치자인 키루스 2세는 메디아 왕국을 점령해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했다.. 그후 다리우스 1세가 이집트와 리비아 일부를 장악했고 기원전 522년에는 제국의 국경을 현재 파키스탄과 인도 북쪽 그리고 유럽의 다뉴브 밸리까지 넓혔다. 다리우스 1세는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허락했고 조로아스터교 신앙도 장려했다. 또 세계 최초로 말들을 갈아타며 전하는 우편 배달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대 이란의 왕국인 파르티아가 메소포타미아 지배권과 오늘날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인 북쪽을 통해 로마가 페르사이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제국과 싸웠다. 그로부터 5백년이 지나서 파르티아인들은 내부의 사산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리고 사파비 왕조(16-18세기)가 들어서서 나라를 통합한다 1501년 이스마일 왕은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분열은 서기 623년 선지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뜬 뒤 후계자의 싸움에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수니파 오스만 제국과 맞설 나라로 규정할 필요가 있어서 시아파를 선택하는 정치적 선택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레바논에서의 긴장, 예멘과 시리아의 내전,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이란과 사우디간 충돌불씨 제공이다. 한편 시아파 최대 축제인 이슈라는 무함마드 손자로 카라발라 전투에서 순교한 후세인의 고통을 느끼자며 피를 내도록 채찍을 하는 풍습이 있다 카라발라 전투는 이란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아 있어 음악,시,연극으로 나타내고 이란 국기에서 붉은 튜립도 후세인이 죽은 후 튜립이 피어났다는 유래가 있다. 사파비왕조는 1736년 현장의 성직자들에 의해 전복됐다. 학문을 한 이슬람 성직만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 외부 세력에는 먹이감, 내부에는 쿠데타와 시위가 만연 >
사파비 왕조가 패망한 뒤 이어지는 두 세기는 내부 힘의 약화와 위부의 위협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제 1차 세계대잔 동안 페르시아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한편 전쟁 발발전에 영국은 대규모 유전을 발견하여 독점적 채굴권과 판매권을 확보했다. 1921년 레자 칸은 1200명의 군인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격해서 곧장 정권을 탈취했다. 1925년 이란 의회는 당시 국왕을 폐위시키고 새롭게 팔레비 왕조를 세운 레자칸을 새로운 국왕인 레자 샤 팔레비로 책봉됐다. 그는 개혁정치로 1935년 국호를 이란으로 개명하고 국토를 횡단하는 철도망을 건설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에는 국왕이 친나치적인 입장일 빌미로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침공하였다.그들은 레자 샤 팔레비를 퇴위시키고 유전을 확보해서 러시아로 가는 공급라인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그의 아들이 즉위하면서 친 서방 정책으로 취했다. 한편 1951년에는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총리가 오르면서 앵글로-이란 오일 컴퍼니를 국유화 조치를 하였다. 이에 영국은 이란 자산을 동결하고 이란으로 향하던 물품을 보류되었고 정유소의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1953년에는 영국과 미국은 군사 쿠데타를 사주하기도 했다.
< 1979년 호메이니의 이란혁명 >
호메이니는 이란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로 1964년 샤가 이란 국민들을 미국의 개보다 못한 수준으로 끌어내렸다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후 그는 문제적 인물로 낙인 찍혀 이라크로 추방되었다가 프랑스에 머물게 되었다. 1978년 무렵부터 이란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국왕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위는 잦아들고 이듬해인 1979년 1월 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결국 국외로 망명했다. 그는 마지막 국왕이자 미국의 영향력에 놓여 있던 이란의 마지막 리더였다. 그러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이라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2월에 호메이니가 백만명이 넘는 인파 속에 테헤란에 입성했다 호메이니는 이란혁명수비대를 창설하고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새정권은 여성의 지위를 축소하고 이슬람혁명위원회 추종자들이 거리를 누비며 여성들에게 히잡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중산층의 수십만명이 떠났고 이들 중에는 유대계 인구가 6만명이나 되었다. 호메이니가 강조한 학식이 풍부한 이슬람 성직자의 통치는 종교와 정치를 일치시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호메이니는 헌법에 명시된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 뒤를 잇는 지도자들은 이슬람 고위 성직자들의 단체인 국가운영지도자위원회에서 선임했다.. 로마카톨릭이의 교황선출과 비슷하나 군통수권 등 정치적 권한만 다를 뿐이다
< 8년간 걸치 이란-이라크 전쟁 >
옆나라 이라크는 세속적인 독재자 후세인이 이란 시아파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꼈다. 호메이니가 아랍국가들에 이슬람 혁명을 호소하자 수니파 출신 후세인은 시아파를 탄압하며 1980년 9월 이란 침공을 감행했다. 이라크 국내의 시아파에게 이란 혁명의 여파가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떄문이다. 후세인은 이란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사트알아랍강의 동쪽과 원유 생산지이자 민족적으로 아랍계가 주로 거주하는 이란 남서부의 후제스탄을 손에 넣을 계획이었다. 후세인은 속전속결로 승리를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1백만명 이상 죽음으로 8년간을 싸웠다.
'아들을 위한 인문학 >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우디 2) 오일머니가 사라지는 이 시점에 사우디는 2030년 비전을 향해 간다고 하는데 (0) 2023.02.14 (사우디 1) 한 가문의 성이 나라 이름이 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서 (0) 2023.02.07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 강점이자 약점이 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 (1) 2023.01.10 21세기 경제 및 외교의 각축장이 된 북극에 대해서 살펴보면 (0) 2022.12.20 종교전쟁으로 얼룩진 국경선에서 핵을 겨냥한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알아보면 (0) 202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