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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1) 한 가문의 성이 나라 이름이 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서아들을 위한 인문학/정치 2023. 2. 7. 02:56
1740년 중앙 아라비아 네지드의 일부 지역은 무함마드 이븐 사우디라는 토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그의 직계 후손 가운데 하나가 영토를 더 넓힌 뒤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는 3500만명이 사는 이 나라에는 1세기 전에는 대략 2백만명이 살았고 대부분이 유목민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 나라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지대다. 이곳에는 석유와 모래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사우디를 20세기와 주요국가로 성장시킨 것은 다름 아닌 화석 에너지원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는데 세계가 조금씩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대화를 서두르고 21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기술을 이용하려고 노력중이다 사우디는 8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쪽에는 요르단과 이라크, 쿠웨이트가 있다.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과 마주하고 있는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가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오만과 예멘이 있다. 한편 사우디는 대부분 서쪽에 모여 사는데 메카, 메디나, 제다나 그 주변에 살고 있고 있는데 이곳 산지야말로 이 나라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유력 가문으로 성장해 가면서 사우디 가문이 와하브파와 다져온 전략적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744년 종교학자 와하브는 사우디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두측의 합의에는 사우디 가문은 정치를 종교적 측면은 와하브파의 영역이라는 입장이 담겨 있다. 이들의 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사우디의 장남은 와하브의 딸과 결혼했다. 양측은 아라비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장정에 나섰다. 1765년경 네지드를 통치하고 있던 그들은 메카, 메디나를 포함해서 전방위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 과정에서 특히 시아파 주류 지역을 겨냥해 나갔다. 21세기에 와서도 와하비파는 공공연히 시아파를 거부자로 비방하고 있다. 사우디는 오만,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레이트의 북쪽까지 점령했던 적도 있으나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통해 군대를 보낸 1818년에는 구도는 무너졌다. 당시 국왕인 사우디는 포로가 되어 이스탄불로 이송돼서 참수당했다. 첫 번째 왕국은 이렇게 무너졌다.. 두 번째 왕국이 1824년에 세워지고 1891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네지드 북쪽의 샴마르 토후국을 통치하던 왕국인 라사드 가문과 아라비아 내륙의 지배권을 두고 싸웠다
현 초대 국왕인 이븐 사우디는 그의 대가족을 이끌고 쿠웨이트로 탈출하였고 1901년 20대 중반 부친의 뒤를 이어 사우디 왕조의 수장이 되면서 네지드의 술탄이라는 칭호도 물려받았다. 그는 라사드 총독을 살해하고 재정복 사업을 하였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즈음에 나머지 영토도 장악하게 되었다. 라시드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이븐 사우디는 영국쪽으로 기울었다. 라자드 왕국을 1922년에 무치르고 1925년에는 메카와 메디나의 헤자즈 왕국도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27년 이븐 사우디는 영국과 협정을 맺게 되는데 영국이 그를 네지드와 헤자즈의 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가로 그는 헤자즈의 북부를 요르단에게 양도하며 요르단 동부 일부 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도 포기하기로 했다. 1932년에 자신의 성으로 나라의 이름이 세워졌다. 이런 사우디의 탄생에 대해 한 교수는 하나의 실체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단일한 역사적 기억이나 민족적 유산이 없는 사람들에게 강요한 국가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십년간 풍부한 에너지자원으로 막대한 부 덕분에 국민들 삶이 개선되면서 정통성이 공고해 졌다
1932년 이전 수십 년 동안 이란, 바레인, 이라크 등지에서 유전들이 속속 발견됐다. 사우디는 1935년에 미국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가 시추하여 1938년에 제 7광구에서 검은색 원유가 나왔다. 이후 새로운 항만을 건설했고 급수용 파이프를 설치하고 인근 부대시설이 만들어졌다. 당시 4만명이었던 새 왕국의 수도 인구는 그로부터 70년이 흐르는 동안 6백만명이 되었다. 석유와 돈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돈이 미국석유회사로 갔으나 점차 사우디측이 점차적으로 지분을 획득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만든 사우디 국영석유기업이 아람코이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사우디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은근히 연합군 편을 들었다. 1945년 루즈벨트와 이븐 사우디는 협정을 체결했는데 사우디는 석유에 접근할 권리를 미국에게 보장해 주기로 하고 미국은 사우디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한 것이다.. 특히 이라크와 요르단을 통치하는 하심 가문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븐 사우디가 죽은후 사우디 왕세자가 뒤를 이었으나 혈세를 자신을 위해 쓰다가 교육이나 보건 사업에 쓸 돈이 부족하는 등 재정정책의 실패로 그리스로 피신하게 되고 그의 이복동생인 파이살이 왕궁에 입성했다. 새 국왕의 재위 동안 석유 수입은 무려 1600%이상 증가했고 통신 및 운송망을 건설하며 후한 복지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다가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자 아랍과 연맹하여 미국에 원유공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하였다. 이에 아람코 유전들이 폐쇄되고 국제 원유가격은 폭등하자 미국은 사우디에 압박을 하자 석유금수조치를 풀어주게 되었다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사담 후세의 다음 목표는 사우디의 유전일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사우디 출신인 오
사마 빈 라덴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 받은 자기 휘하의 무자헤딘을 투입하겠다고 제안을 했다. 사우디 국왕은 이 제안을 물리치고 미군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미국 연합군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물리치고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었다. 빈 라덴은 신앙심이 없는 미군병력의 주둔은 이슬람 개혁가들은 반발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사우디 무장 세력이 포함된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는 1995년부터 미국을 상대로 대테러 전쟁을 진행하였다. 1996년에는 미국 민간인 주재원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목표로 폭탄 테러를 하여 19명이 숨졌다. 그리고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났다. 여기에서 19명의 9.11테러 주동자 가운데 15명이 사우디 출신이었다.. 사우디 왕가는 충격이 휩싸였다. 한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행에서 사우디 영역의 공군기지 사용을 허용하였다. 미군은 카불에서 탈레반을 몰아냈고 바그다드를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2003년 철수를 발표했다. 그러나 빈 라덴은 계속적인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2017년 사우디 살만 국왕은 31세된 아들인 모하메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지명했다. 대외정책에서 미국이 이라크에서 일으킨 혼돈은 이란과 연계된 시아파 정부를 이라크에 탄생시켰고 이란은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다수를 무장시키는데 무기와 자금을 댔다. 반면 사우디는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를 인정하길 거부함과 동시에 수니파 민병대에 자금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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