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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세기 신이 아닌 인간의 삶을 담은 태피스트리 작품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아들을 위한 인문학/미술 2022. 11. 17. 03:40

    바이외 태피리스트

    중세 유럽에는 성당도 물론이거니와 왕이나 귀족이 살던 성 역시 무거운 돌로 지어졌다. 그 견고함으로 인하여 외부의 침입도 막고 더 높이 쌓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지만 반면 창문을 크게 낼 수 없어서 내부가 어둡고 겨울에는 난방에 취약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난방시설로는 벽난로가 전부여서 외부의 냉기가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막기 힘들었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태피스트리를 벽에 걸었다. 유럽 전역의 성들은 화려한 문양이 있는 태피스트리나 자수가 된 천이 벽을 감싸고 있다. 사실 건축적 특성이나 극적이고 번쩍거리는 장식물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성당 내부의 상당 부분은 직물들로 꾸며져 있다 큰 창이 나 있는성에서는 여러겹의 커튼이 화려하게 드리워져 있고 의자나 소파, 침대와 같은 가구도 천으로 씌워져 있거나 마감되어 있다

     

    요즘으로는 치면 섬유예술로 여성 영역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예술작품으로 보지 않았고 기록도 거의 없다. 또한 섬유작품들은 주로 소모품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8세기 말 정도부터 교회나 수도원을 태피스트리로 장식했다는 언급은 있으나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예술작품으로 인정되어 2007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바이외 태피스트리>이다. 이 작품은 11세기에 만들어졌음에도 보존상태가 좋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높이 50에 길이 70m로 크기가 거대하고 상하지 않게 천을 덧대어서 350kg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1066년부터 1077년경 사이에 만들어진 후 1476년에 바이외 성당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잊혀졌다가 1729년에 다시 주목받아 왕립아카데미에 전시되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한 학자에 의하여 바이외 태피스트리라 불리기 시작하면서 고정되었지만 사실은 직조를 하면서 무늬를 넣은 태피스트리와 달리 천위에 털실로 자수를 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윌리엄 1세의 왕후가 그린 것이 아닌 왕의 이복동생인 주교 바이외의 명으로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담긴 내용은 1064년부터 2년간 영국과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1064년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는 자신의 후계자로 친척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을 지목하고 해럴드를 특사로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해럴드는 자신이 왕으로 오른다. 에드워드 왕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하고 있던 윌리엄 공은 해럴드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한다. 그래서 윌리엄은 왕위탈환을 위해 잉글랜드를 침략하였고 이때 주교 역시 동행한다. 마침내 월리엄은 노르망디 공이자 잉글랜드의 왕이 된다. 그렇게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게 되고 이후 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1337-1453)이 시작될 때까지 프랑스풍 분위기가 지속된다. 그리고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노르망디 공이었던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과정을 상세한 인물들의 행동으로 표현하고 라틴어로 설명한 작품이다

     

    해럴드가 윌리엄의 맹세 등
    해럴드가 죽는 장면

    작품 자체가 윌리엄의 이복동생 바이외가 주문제작한 것이기에 작품은 윌리엄의 정복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표현하고 있다. 해럴드가 목숨을 구해주고 기사 작위까지 내린 윌리엄 왕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점과 윌리엄 왕과 자신이 어떻게 전쟁에 이겼는지를 주로 담아낸다. 더불어 해럴드가 왕으로 즉위할 때 떨어지는 혜성을 보고 사람들이 불길한 생각하는 장면을 삽입하며 하늘마저도 해럴드가 아닌 윌리엄 왕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승자의 관점에 따른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총 32가지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청록색, 초록색 등 다양한 색실을 사용해서 화려하게 수를 놓았지만 형태가 투박하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초기 중세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해당된다.

     

    용머리가 있는 바이킹식 배에는 줄무늬를 넣었고 갑옷의 비닐 모양을 여러색의 무늬로 표현하기도 했다. 위아래는 동물문양이나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을 해서 빈 공간을 효율적으로 꾸미기도 하는 등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주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전쟁물자를 준비하는 상세한 모습이나 장례의 모습, 성과 갑옷, 배와 항해 등의 생활상을 담고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좋은 단서가 된다. 이 작품에서는 에드워드 왕의 장례식에서 하늘의 은총을 뜻하는 손이 내려오는 장면 외에는 종교적인 표현이 거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간의 왕권 다툼이라는 인간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15세기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랭부르 형제가 그린 <베리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속 달력화가 있다. 이 기도서는 매일 기도문과 성가가 담긴 時禱書(시도서)로 앞부분에는 절기의 변화를 나타내는 달력이 그려져 있다. 프랑스의 장 2세의 아들이면서 샤를 5세의 동생인 베리공작은 왕자이자 국토의 1/3을 소유한 대영주로 평생을 부유하게 살았다. 당시 프랑스는 백년전쟁 중이었던 만큼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위험했지만 베리 공작은 자신이 소유한 17개의 성과 저택을 유람하며 삶을 즐겼다. 그리고 예술 애호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주문하고 소유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베리공작의 아름다운 기도서>라 불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12장의 그림이 실렸는데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이 상세하고도 아름답게 담겨있다. 또한 이들 12달을 날짜와 별자리, 달의 모양과 함께 그린 천문화이기도 하며,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베리공작의 아름다운 기도서

    이 그림은 백성들의 삶의 기록이 전무한 시기에 비록 베리공작의 귀족의 작품이지만 농민의 삶을 그렸다. 하지만 농민의 고된 삶보다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공작의 영지를 감상할 수 있는 수준으로 포장되어 있다. 사실 이 기도서라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다. 아직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일일이 손으로 쓰고 그려졌으며 제작 기간도 몇 년이 걸렸고 가격 또한 비쌌다. 기도서의 표지를 꾸미는 데에는 가죽이나 양피지, , 청금석 등 비싼 재료가 주로 사용되었되어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이에 베리 공작이 랭부르 형제에게 자신의 부와 권력에 걸맞는 기도서를 요청했고 총 206쪽의 최고급 양피지로 제작되었고 크고 작은 삽화가 130여개나 있다. 제작 도중에 흑사병이 도는 바람에 랭부르 형제가 완성을 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1월

    각 페이지의 기본 구성은 동일하다. 상단에는 반원형의 천궁도가 있고 그 아래에는 그 절기에 해당하는 생활상이 표현되어 있다. 천궁도는 날짜와 별자리, 그리고 달의 모양이 있는 부분 등 8개의 반원형의 줄로 나뉘어 있다. 이중 별자리를 그림으로 그린 부분에서는 실제는 6개의 별자리가 보이는데 반해서 대표적인 별자리 2개씩만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12페이지의 생활상은 모두 다르다. 가장 화려한 장면은 1월이다. 벽에는 전투장면이 있는 거대한 태티스트리가 걸려있고 커다란 식탁에는 금식기에 담긴 음식이 가득하다. 실내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고 오른편에 푸른 옷에 털모자를 쓰고 다소 크게 그려진 남성이 베리공작이다.

     

    4월

    2월부터 12월까지는 모두 바깥의 풍경인데 멀리 원경에는 베리 공작이 방문한 성이 표현되고 앞에는 귀족이나 농민들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한편 다소 부자연스러운 원근법적 표현과 달리 세밀하고도 사실적인 묘사와 화려한 색채는 15세기 플랑드르를 비롯한 북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딕 양식 회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크게 귀족들의 모습과 농민들의 모습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월과 함꼐 4, 5, 8월에는 귀족의 생활상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8페이지는 농민들의 생활상이 나타나 있다. 4월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가 모여있고 검은 모자를 쓴 여인에게 붉은 모자를 쓴 남성이 반지를 주고 있다. 여성은 베리 공작의 열한 살 손녀로 두 남녀가 결혼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5월에는 숲에서 귀족들이 말을 타고 제를 즐기고 있고 8월은 탕페 성 앞에서 매 사냥을 즐기고 있다. 매는 길들이기가 쉽지 않은 만큼 귀족들의 고급 취미이기도 했다. 2월에는 눈이 소복히 쌓인 중세 겨울 농장의 모습이 보인다. 양들은 모두 외양간에 들어가 있고 왼편의 집 내부에서는 농민들이 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다. 그리고 3월에는 갈색 소와 검은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기도 하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며, 양을 치는 장면이 루이앙 성 앞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초록빛이 된 밭에서 남녀가 파리 시테 섬의 성당을 배경을 두고 일을 하고 있다. 7월에는 푸아티에 재판소 앞 들판에서 곡식이 누렇게 익어서 추수하고 양치기 부부가 양의 털을 깎고 있다 9월에는 소뮈르 성 앞 포도밭에서 와인의 재료인 포도를 따고 있는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왼편 아래의 한 남자는 딴 포도를 맛보기도한다. 10월에는 루브르 성을 배경에 두는 세느강 건너편에서 씨앗을 뿌리는 농민들과 새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 모습이 보인다. 11월에는 돼지치기 모습이 12월은 벵센 성을 배경으로 멧돼지 사냥을 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12페이지에 세밀하게 그려진 이 그림들을 통해 현재와는 다른 성 주변의 모습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화려한 의복뿐 아니라 식기, 건축물, 그리고 농사방식과 농민과 귀족의 생활차이 등이다. 자신의 영지가 아름답고 행복하며 풍요로운 곳이란 긍정적인 면만을 과장하고자 한 베리공작의 지닌 가진자의 오만이 있기도 하다 이 기도서는 여러 소장자의 손을 거쳐 콩데 미술관에서 처음 대중에게 공개가 되었는데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왕의 모습도 역사적 사건도 아닌 것이 때문이다 이 그림의 중요한 이유는 중세시기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고 성경의 이야기가와 관련한 삽화가 당연하던 때에 당시 권력층인 귀족의 모습과 함꼐 농민의 노동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다시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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