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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맞아야 산다는 매품팔이는 어떠했나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9. 13. 05:23
이때 본읍 김좌수가 흥부를 불러 하는 말이 돈 서른 냥을 줄 것이니 내 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 생각하되 서른 냥을 받아 열 냥어치 양식 사고 닷 냥어치 반찬 사고 닷 냥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을 조섭하리라 - 흥부전 - 흥부는 곤장을 맞아 주면 서른 냥을 주겠다고 제안받는다. 몇 대를 맞는 조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곤장의 최대 한도인 100대는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전까지 흥부가 하던 일을 말 편차 박기,(5푼) 분뇨 수거,(2푼) 빗자루 만들기 (1푼) 따위였다. 100푼이 한냥이니 서른 냥을 벌려면 말 편자 600개를 박거나 화장실 1500곳을 청소하거나 빗자루 3000여개를 만들어야 한다.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20푼 정도였다. 서른 냥이면 150일 치 임금에 해당한다. 넉넉잡아 반년 생활비이다.
승정원일기에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았다라는 기록이 더러 보이니 매품팔이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 처음부터 돈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들이 늙고 병든 아버지 대신 곤장을 맞겠노라고 나섰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보인다. 아버지 대신 곤장을 맞다가 죽은 아들도 있었다. 비속이 존속 대신 곤장을 맞는 것은 일종의 효행으로 간주하여 암암리에 허용한 듯하다. 주인이 맞아야 할 매를 노비가 대신 맞는 경우도 흔했다. 이것이 어느새인가 거래로 바뀌었다 조선후기 문인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직업적 매품팔이가 등장한다.. 그가 곤장 100대를 맞고 받은 돈은 고작 7냥이다. 욕심쟁이 아내가 채근하는 바람에 하루 세차례나 매품을 팔던 그는 결국 곤장을 맞다가 죽고 말았다
조선시대 법전에 따르면 곤장 100대는 7냥의 벌금으로 대납이 가능하다. 매품팔이의 품삯이 7냥을 넘으면 고용할 이유가 없다. 벌금을 납부하면 그만이다. 흥부가 30냥을 받기로 했다는 말은 과장이다. 받은 돈을 다 갖는 것도 아니다. 곤장을 치는 형리와 나누어야 한다. 청성잡기에는 매품팔이가 형리에게 줄 돈을 아끼다가 호되게 곤장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곤장을 치는 횟수는 정해져 있지만 강도는 치는 사람 마음이다. 형리에게 뇌물을 주고 살살 치게 했다는 기록을 셀 수 없이 많다. 뇌물을 주지 않아 허리를 맞고 불구가 된 사람도 있다. 매품팔이가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받고 곤장을 맞아 주는 매품팔이는 사법질서를 문란케 했다지만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로 그 역시 허술한 법제도의 피해자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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