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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똇목 아리랑에서 보듯 떼돈 한번 벌어 보려고 뗏꾼이 된 이들에 대해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3. 29. 04:13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 / 만지작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 / 영월덕포 공지갈보 판을 닦아 놓게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 정선 뗏목 아리랑 -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는 송금이라는 제도가 있어 635곳의 봉산을 지정하여 보호했다. 소나무는 건축재와 땔감에 관곽과 조선 등 수요가 많았으나 공급은 부족해서 집의 크기를 억지로 줄이는 졍책을 펴기도 했다. 무릎을 겨우 들이는 좁은 집이라는 용슬은 빈말이 아니었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많은 집을 짓게 되자 압록강 일대에서까지 목재를 들여왔다고 했다. 그 많은 목재를 어떻게 옮겼을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 물길은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이 활용되었다. 목재는 매우 무겁지만 물에 떴으므로 나무를 엮어 물길 따라 내려보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조선초부터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목재를 공물로 바쳤는데 이때 뗴꾼은 물길로 떼를 옮기는 일을 했다. 세종실록에서는 강원도 백성들은 농한기가 되면 뗴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순전히 떼꾼으로 업을 삼는 이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강 연안에 사는 모리배들이 공갈을 쳐서 떼꾼이 옮기던 나무를 빼앗거나 대금 지급을 지연하고 헐값에 강매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세종은 실상을 조사해 폐단을 없애 주었다
세조와 성종때는 나라에서 쓸 목재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적인 벌채를 금지했다. 괜찮은 수입원이 사라진 강원도 백성들의 삶은 날로 궁핍해졌다. 농사만으로 한해를 넘기기 어려웠던 현지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결과였다. 탐관오리들은 강원도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 정도로 남벌을 일삼았으면서 떼꾼들에게는 벌채가 금지되었다는 등의 명목으로 나무를 빼앗거나 가두어 매를 치고 속전까지 요구하면서 괴롭히기도 했다. 떼꾼의 작업은 나무를 베는 일부터 시작된다. 나무는 가을에 열두자정도로 미리 베어둔다. 이듬해 봄에 눈이 녹아 길이 미끄러워지면 산 아래의 강어귀로 내려보낸다. 떼는 열둘 내지 열다섯 동가리로 엮고 이를 기차처럼 연결됐다. 보통 30미터를 넘었으며 이것을 한 바닥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이 한 바닥의 떼를 운행했는데 앞 사공은 물길을 잘 알아야 해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맡았고 뒷 사공은 키를 잡아야 하므로 힘 좋은 사람이 맡았다
떼는 얼음이 녹는 4월경부터 다시 얼기 전인 음력 10월말까지 내려보냈다. 출발할 때 떼꾼에게 얼마 분량의 나무가 내려간다는 도록을 적어주고 나무를 분실하면 배상책임을 지웠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일이 많았기에 몇 동가리 정도의 손실은 눈감아 주었다. 물이 많을때는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이면 갈 수 있었지만 물이 적으면 한달도 걸리곤 했다. 문제는 곳곳에 숨어 있는 돌부리와 여울이었다. 돌부리에 걸리면 떼를 묶은 부분이 찢어져 나무를 잃어버릴 수 있다.물살이 센 여울에 휘말리면 돼지꼬리 친다라고 하여 뗏목이 돼지꼬리처럼 말리면서 묶은 곳이 몽땅 터져 버리게 된다. 이 경우 물에 빠질 죽을 수도 있었다. 떼꾼들에게 돼지꼬리 치라는 말은 금기어이자 아주 심한 욕이었다. 가장 위험한 여울은 평창의 황새여울과 영월의 되꼬까리 여울이었다
위험한 일인 만큼 보상도 컸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경북궁을 중건하면서 동강에서 한강 일대는 떼꾼으로 넘쳐났다. 당시 군수 월급이 5원이었는데 떼를 한번 타면 15원을 받았다고 한다. 많게는 1년에 일곱 번 이상을 왕복할 수 있었으니 농사 외에는 변변한 수입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떼돈을 벌 대박의 기회였다 - 천질에 만 질에 떼 품을 팔아서 / 술집 갈보 치마 밑으로 다 들어가구 말았네 / 돈 쓰던 남아가 돈 떨어지니 /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 맞은 국화라 / 술 잘 먹구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일러니 / 술 안 먹구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일세 < 정선 뗏목 아리랑 >
그렇다 보니 이들의 돈을 노리는 이들도 많았다. 남한강 가에 즐비한 주먹에서는 뗴꾼이 지날 때마다 작은 배를 타고 따라오며 술과 노래로 유혹했다. 큰돈을 벌어 씀씀이가 헤퍼진 떼꾼들은 주색에 빠지거나 노름판에서 힘들게 번 돈을 탕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이는 입던 바지까지 몽땅 뺴앗기고 속옷 차림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도 했다. 떼꾼은 강에 다리가 놓이고 보가 설치되면서 점점 줄어들었고, 1960년대 말 팔당댐이 건설되어 물길이 끊기자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떼꾼이 즐겨 부르던 아리랑만 남아 그들의 삶과 애환을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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