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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시대에 조선의 소방수였던 멸화군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3. 22. 03:28

    도성 안에 멸화의 법을 담당하는 기관이 없어 백성들이 부주의로 화재를 일으키면 집이 타 버려 재산을 탕진하니 그들의 목숨이 애석하다 - 세종실록1426년 인순부(동궁에 딸린 관아)에 살던 노비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는 거센 바람을 타고 민가와 관아 2000여채를 태웠다. 이 사고로 32명이 숨지고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이튿날에도 화재가 일어나 민가 200여 채가 또 불탔다. 당시 한양에 있던 가옥 18천채 중에서 1/10만인 넘게 불타 버린 큰 화재였다

     

    집의 주요 재료가 나무인데다 지붕을 지푸라기라 엮어 덮은 초가집이 대부분이어서 불이 한번 붙으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불이야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불을 끄는데 정신을 파는 틈을 타 도둑질을 하려고 좀도독이 일부러 불을 지르기도 했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을 금지한 인정제도는 밤에 돌아다니며 도둑질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세종때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 화재가 한번 발생하면 100채 정도는 금세 타 버렸다고 하니 화마는 무서운 재앙이었다. 건축물 앞에 세워 둔 해태상이나 물과 얼음을 형상화한 다양한 그림과 부적, 담벼락의 무늬, 지붕의 치미와 추녀마루에 세운 용두, 방화수를 담아 두는 드므는 모두 화마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드므는 궁궐 정전처럼 중요한 건물 네 모서리에 방화수를 담아 놓는 그릇을 말한다. 화마가 불을 내려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믿었다

     

    크고 작은 화자개 잇따르자 세종은 최초의 소방기구인 금화도감을 설치한다. 여기에 금화군 또는 멸화군이라 불리는 전문 소방수를 배속시켰다. 이들은 종루에서 화재를 감시했고,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화벽을 설치하거나 화재를 진압하는 각종 도구를 준비했다. 또한 일정 구역마다 물을 담은 항아리를 비치하고 우물을 파도록 했으며,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도록 간격을 두고 도로를 넓히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는 등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애썼다

     

    화재가 일어나면 멸화군은 불을 끄러 왔다는 신패를 차고 물을 떠 오는 역할을 맡은 급수비자와 함께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출동한다. 화재 진압 중에는 계속해서 종을 울렸고 불이 난 곳 근처에 높은 깃발을 세워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멸화군이 사용한 장비는 지붕으로 올라가기 위한 밧줄과 긴 사다리, 지붕의 기와나 짚을 걷어 내기 위한 쇠갈고리 따위였다. 도끼는 기둥을 찍어 건물을 무너뜨릴 때 사용했다. 또 물에 적신 커다란 장막으로 불이 난 곳과 그 주변을 덮어 두고 물을 계속 뿌려서 불을 끄고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장비가 열악할 뿐 아니라 목조 주택은 복구할 수가 없었기에 화재를 직접 진압하기보다 불이 난 건물을 무너뜨려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현대와 같이 물을 직접 뿌리는 방식의 수총기는 1723(경종 3)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

     

    세종떄 창설된 금화도감은 성문의 관리 업무를 추가로 맡아 수성금화사로 개편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필요없는 비용과 인원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혁파되고 소방업무는 한성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467년에 발생한 화재로 금화군을 50인으로 늘렸고 1481(성종 12)에 다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자 금화도감의 재설치를 논의했지만 후속 조치는 없었다.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가 소방업무를 맡았다가 일제강점기에 소방서라는 화재전담기구가 생겼다. 큰 화재가 일어났을 때만 잠깐 생겼다가 사라진 금화도감을 보면서 지금까지도 소방관에 대한 대우는 여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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