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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도 山尺출신이라고 하는데 탁월한 숲속의 사람 산척은 어떻게 발전해갔나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2. 18. 04:02
변방 백성 중에 조총을 잘 쏘는 자를 봤습니다. 호랑이가 삼사 간쯤에 있을 때 비로소 총을 쏘는데 명중시키지 못하는 사례가 없으니 묘기라 할 수 있다 < 영조 승정원일기 >. 조선에서 중요하게 여긴 야생동물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꿩,다른 하나는 호랑이다. 꿩고기는 종묘 제례에 빠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임금 생일이나 단오, 추석 등 큰 명절이오면 꿩을 서른 마리씩 바쳤다. 꿩과 반대로 호랑이는 퇴치 대상이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경기도에서만 한달 동안 120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꿩을 잡아 종묘에 제사를 올리고 호랑이를 물리쳐 민생을 돌보는 일은 똑같이 중대한 나랏일이었다
꿩고기는 응사라는 매사냥꾼을 동원해 마련했다. 꿩 잡는게 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매는 꿩 사냥에 요긴했다. 때로는 산채로 잡아야 했다. 신선한 고기를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꿩을 산 채로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매나 개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꿩을 산채로 잡는 일에는 망패가 나섰다. 망패는 그물을 다뤄 짐승을 포획하는 생포 전문 사냥꾼이었다. 망패는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 꿩이나 사슴을 상처없이 잡았다
응사나 망패와 달리 민가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산척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보급되면서 산척은 활을 버리고 총을 들었다. 이들을 산행포수라 불렀고 이후로 사냥꾼이라고 하면 으레 산행포수를 지칭했다. 산척 가운데서도 평안도 강계지역 산행포수가 유명하다. 호랑이 사냥꾼을 산척 중 으뜸으로 쳤는데 평안도 강계에 호랑이 잡는 산행포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에는 근교의 호랑이를 퇴치할 목적으로 서북인을 뽑아 부대를 만들자는 비변사의 건의가 보인다. 개항 직후 함경도 원산항에서만 한해 호랑이 가죽 500장이 거래되었다. 평안도와 함경도 산척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조선 사냥꾼 산척의 사격술은 외국인의 눈에 묘기에 비쳤다. 고종의 고문을 역임한 윌리엄 샌즈는 조선비망록에서 산척을 탁월한 숲속의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샌즈가 본 산척은 심지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구식 화승총을 들고 호랑이나 곰 가까이 다가가 단발로 급소를 저격했다. 승정원일기에 언급된 산척도 실력이 출중했다. 1간이 1.8m 남짓 되었으니, 그 산척은 3-4간, 곧 5-6m 거리까지 호랑이에 다가가 사격한 셈이다
산간에 폭설이 내리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움직이기 어렵다. 이때 산척은 설피와 설마를 착용하고 사냥에 나섰다. 설피는 눈길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덧신이다. 설마는 서양 스키와 똑같은 모양의 썰매로 짐승을 잽싸게 뒤쫓는 데 썼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산골짜기에 눈이 두껍게 쌓이기를 기다려 한 이틀 지난 뒤 나무로 말을 만든다. 두 머리는 위로 치켜들게 한다. 밑바닥에 기름을 칠한 뒤 사람이 올라타 높은데서 아래로 달리면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다라고 적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설마타는 소리가 우레같아 호랑이가 이 소리를 들으면 옴짝달짝 못했다고 적었다
산척은 규율이 엄격했다. 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으며 상갓집에 조문도 가지 않았다. 몸을 청결하게 한 뒤 산으로 들어갔다. 짐승을 잡으면 반드시 혀나 귀 혹은 심장을 산신에게 바쳤다. 노루나 돼지를 잡으면 바로 귀와 혀를 끊어 나뭇잎에 싸 젓가락과 함께 높은 곳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산척은 사격술이 뛰어났던 탓에 전란이 일어나면 우선 징집되었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우의정 유후조는 고종에게 산척을 차출해 싸우고자 주장했다. 산척은 평소 사냥터에서 생활하여 사격술이 예사롭지 않은 반면, 정규군 포수는 쌀만 축낸다는 것이었다. 오래 훈련받은 정규군보다 사냥터에서 맹수를 상대로 갈고닦은 산척의 사격술을 더 높이 평가한 말이었다. 1907년 총포화약단속법이 시행되어 그해 11월까지 구식 무기인 화승총, 칼, 창이 10만점, 신식 소총이 3800정이 압수되었다. 압수한 무기 가운데 화약과 탄약이 36만근이나 되었다. 총류 대부분이 산척의 것이었다
총을 뺴앗긴 산척은 생업을 바꾸거나 국경을 넘어 간도로 이주했다. 총을 버리지 못해 국경을 넘었던 산척 상당수는 무장 독립군에 헌신했다. 혀를 내두를 사격술을 지니고 맹수와 싸우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생활했던 산척이었기에 산악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홍범도 장군 역시 산척 출신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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