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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하는 과정에서 역대 서기장은 어떻게 변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세계사 2022. 1. 24. 03:47

     

    199112월에 공산주의의 맹주였던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을 주축으로 하여,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공화국 대통령과 슈시케비치 벨로루시 백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등 3명은 독립국가 공동체의 창립을 선언했다. 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3개국만의 합의로 소련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나머지 8개 공화국들이 속속 공동체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고르바초프는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다.

     

    돌이켜 본다면 소련의 해체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후 1964년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그리고 코시킨이 수상으로 선임되었다. 베테랑 정치가 코시킨의 역할이 두드러져서 1965년에는 이윤도입 방식에 의한 경제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브레즈네프가 당 조직과 정치국을 자파인물로 굳히며 실권을 장악했다. 그의 등장으로 미국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함으로써 데탕트를 추진하려 한 정책은 후퇴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두에 걸쳐 브레즈네프는 권력의 절정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공업생산과 농업생산은 멈추었다. 공업에서는 소비재가 부족했고 농업에서는 곡물을 서방으로부터 구입해야 했다. 품질이 낙후된 공산품은 국제 경쟁력을 잃었고, 국제수지도 악화되기만 하였다. 이같은 사태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원인은 스탈린 이래의 정치가 경제에 우선하는 시스템, 극도로 중앙 집권적인 계획 경제, 그리고 브레즈네프 시대의 안정에 따른 정체에 있었다.

     

    한편 서구와 일본은 경제성장 면에서 두드러져 발전을 이루고 있었고 또한 신흥 공업 국가도 고도성장을 달성했으며 중국조차도 경제계획에 의해 보다 일정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제 소련에서도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었으나 그도 1984년에 사망하였다. 이에 체느렌코가 서기장이 되었으나 고령으로 1985년에 사망했다. 2대에 걸쳐 서기장이 단명으로 끝났기 때문에 차기 서기장에는 젊은 세대를 기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52세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대학 출신으로서 레닌을 제외한다면 러시아 혁명 이래 고등 교육을 받은 최초의 지도자였다.고르바초프는 새 노선을 발표했다. 우선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제창하고 개혁파 지식인의 제언을 대담하게 채택하는 동시에 개혁파 인물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또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계기로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제창했고, 그 이후에도 모든 문제들이 언론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제도를 도입하여 당 지배를 악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정책은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우선 보수파가 반격을 했고 개혁파의 많은 지도자들이 보수파의 균형을 저울질하는 고르바초프에게서 떠났다.

     

    1991년 소련 보수파 쿠데타

    더구나 일찍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동구권의 자유화와 소련으로부터의 이탈을 촉진했던 것과 같이 페레스트로이카는 오랫동안 억제되어 오던 민족적 불만을 단번에 뿜어내게 하였다. 19918월 소련 보수파에 의한 쿠데타와 고르바초프의 실각 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졌다 쿠데타는 며칠 만에 실패로 끝났고 그후 소련의 동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쿠데타를 종식시킨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옐친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쿠데타 미수 사건을 계기로 발트 3(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발트 3국의 독립 요구 배경에는 1939년 독소 비밀 협정에 의해 3국이 소련에 점령당했던 과거의 경위가 있었고 이와 같은 점령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간절한 민족적 소망이 있었다.

     

    CIS (독립국가 공동체)
    원유가격 변동 추이

    1917년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세운다는 국시 아래 출범한지 꼭 74년만의 일이다. 공산주의 몰락이후 여러 공화국의 연합체인 독립국가 공동체 CIS가 발족되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뒤를 이어 자유의 기수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는 진보적인 개혁정책을 펴나갔다. 즉 각 공화국들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되 러시아 공화국의 세력권 안에 묶어 둔다는 구상이다. 옐친의 계획은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독립국가 공동체는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미래와 옐친의 앞날에 곧 먹구름이 드리웠다. 보수주의자들이 옛 소련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옐친과 강하게 대결했고 소련에 속했던 민족국가들은 떨어져 나갔다. 지금 푸틴 러시아 연방 대통령은 1999년 총리를 시작으로 대통령을 4번 총리를 2번으로 21년 넘게 장기 집권하여 강한 러시아를 주창하며 미국과 대립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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