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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캔버스에서 카오스를 발견한 추상표현주의 미술가 잭슨 폴록의 세계는
    아들을 위한 인문학/미술 2021. 10. 27. 05:00

    미국의 현대 미술가 잭슨 폴록은 흔히 미술계의 제임스 딘으로 표현한다. 1940년대 후반 그는 바닥에 펼친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붓는, 이른다 Drip Painting으로 작품을 제작하여 서양 회화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미술가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로 잰듯한 기하학적 추상 대신, 감성과 무의식에 기댄 볼록의 Action Painting에 미술가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입체파나 야수파, 기하학적 추상 등 어지간한 추상에 익숙해진 유럽 관객들에게도 바닥에 갠버스를 깔아놓고 붓도 대지 않은 채 물감통에 구멍을 뚫어 물감을 흘려 그린 그림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미술계의 제임스 딘

    잭슨 폴록이 제임스 딘에 비유되는 데에는 그의 괴팍스럽고 반항적인 행동과 비극적인 삶도 한몫을 차지한다. 평생에 걸친 음주와 일련의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감옥과 정신병원을 번갈아 드나들었던 그는 광폭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현대 미술가의 후원자였던 페기 구겐하임의 벽난로에 소변 본다던가, 만찬 식탁을 뒤엎는다던가, 바에서 패싸움을 벌인 일 등으로 그는 늘 구설수에 올랐다. 1956년 친구들과 술을 마쉰 뒤 과속으로 운전하다 전복 사고로 생을 마감했던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정신분열증환자 그리고 신비주의자였던 그의 미술계의 제임스 딘 혹은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전위 미술가의 상징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었다

     

    추상표현주의 작품

    폴록과 드 쿠닝의 추상표현주의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를 평정한 미술사조였다. 20세기 들어 인상주의, 야수파 등이 큰 인기를 누렸으나 그것은 유럽인들의 유행이었다. 뉴욕에서 출발한 추상표현주의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휩쓸었고 남미와 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폴록에 의해 시작된 세계 미술의 중심축 이동은 1960년대 미국의 전위 미술가 라우센버그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마침내 대상을 수상하면서 완결되었다. 여기에는 잭슨 폴록에 대한 CIA의 배후 지원설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미국 정부의 후원이 있었음을 물론이다

     

    Mural(1943)

    플록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환대를 받지는 못했다. 그린다라는 회화의 고전적 임무를 내팽개친 채 우연성을 강조한 그의 작업 방식은 대중적 관심을 끌기 위한 제스처로 끊임없이 의심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화가의 무의식과 감성에만 몰두하느라 대상을 화면에서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써 일반인과 미술 사이의 거리를 그만큼 벌려놓았다는 비판도 늘 따라다녔다. 또한 타임에서 "Chaos damn it"으로 혹독한 비평의 기사가 실렸다 잭슨의 뿌리기 기법은 완전히 혼돈의 극치로 카오스 그 자체라는 내용이다

     

    Box Counting 기법

    컴퓨터 분석 전문가는 폴록의 그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폴록의 그림에는 두가지 요소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폴록이 자신의 몸으로 물감통을 치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물감이 통에서 흘러내리는 운동이었다. 이 두가지 운동으 서로 다른 스케일 그림의 궤적에 영향을 미쳤다. Box Counting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계산된 폴록의 그림은 작은 스케일과 큰 스케일로의 차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통해 폴록이 처음에 굵은 궤적으로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린 후 수많은 자기 유사 구조의 궤적을 통해 그림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어갔다고 주장했다. 폴록의 그림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자기 유사성을 직감적으로 이해한 폴록의 세밀한 계획하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그림 안에는 물감의 점성과 흔들리는 물감통의 속도, 물감을 떨어뜨리는 각도와 높이 등이 만들어낸 정교한 자연의 패턴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무의식적 흐름으로 작업중

    그가 처음 뿌리기 기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30년대 말 시퀘이로스의 실험 공방에서였다고 하는데, 뿌리기 기법이 실험적 의미를 넘어 무의식적 이미지를 이끌어내는 형식 언어로서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 뉴욕에 망명중인 초현실주의자들과 만나 무의식의 흐름에 의한 자동기술법에 한껏 매료되면서부터였다. 처음 폴록은 그린 이미지를 붓으로 다듬거나 기존의 이미지를 제거하기 위해 물감을 흘리는 방법을 썼다. 그러다가 점차 막대기나 붓으로 또는 물감통 그 자체를 이용해서 뿌리는 기법을 전면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폭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격렬한 액션이 가는 대로 물감을 흩뿌림으로써 데생과 채색이 하나로 융합된 세계를 만들었다

     

    폴록이 자신의 몸짓과 물감통의 반복운동이 만들어낸 궤적들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 드러내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폴록은 지시성이나 방향성을 갖는 형상을 거부하고 우연성이 빚어낸 패턴에 주목했지만 그의 3차원 몸놀림이 만들어낸 2차원 궤적에는 자연의 중요한 특성인 카오스와 프랙탈이 찍혀있다. 그는 풍경화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거미줄처럼 엉킨 그의 그림 안에는 자연이 통째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사후 수많은 화가들이 새로운 화법의 개발을 시도했다. 그림물감이 담긴 주머니를 총으로 쏘아 캔버스 위로 흘러내리게 하는가 하면, 모종삽으로 물감을 퍼서 총 센티미터 두께로 캔버스 위에 쌓아올리거나, 캔버스를 난도질하기도 했다, 또 모델의 알몸에 물감을 칠한 뒤 바닥에 펴놓은 캔버스 위에서 몸부림치게 하기도 했다. 무대에서 사람의 신체 일부를 칼로 벤 후 그 피로 그림을 찍어내는 론 애시의 행위예술까지 갖가지 기발한 화법이 지금도 난무하다. 그러나 폴록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폴록의 제스처에 주목했지만 그의 그림에서 들리는 자연의 리듬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출저 : 정재승 <과학의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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