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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화풍의 개척자인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 세계를 어떠한가아들을 위한 인문학/미술 2021. 12. 9. 03:57
18세기에 들어와 미술은 중국적 화풍에서 벗어나 자아의 각성이 뚜렷하고 서민적인 생활의식을 담아내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 경향을 대표하는 화가가 정선, 김홍도, 신윤복이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조선후기 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간 인물이었다. 중국의 산수나 상상의 세계를 그린 종래의 화풍을 벗어던지고 이 땅의 자연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화폭에 담아내어 이른바 진경산수라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조선의 많은 예술가가 그러하듯이 정선에 대한 기록은 현재 거의 전해지는 것이 없고 단지 그의 단편적인 생애와 작품만이 전해질 뿐이다. 양반계급 출신이었던 정선이 본격적으로 그림에 정진하던 시기는 1706년경 즉 그의 나이 30이 되던 해인 것으로 어림된다. 그런데 이때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사회 전반에 움트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이도 했다
이 당시 회화계에서는 중국그림의 복사나 그 방법을 그대로 베끼는 이른바 관화가 유행했다. 물론 정선도 초창기에는 중국그림을 모방했다. 30세를 전후하여 그가 남긴 중국식 그림은 주로 남종화였다. 남종화는 명청시대 유행한 화풍으로 자연의 경관을 반점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하는 화풍을 말한다. 따라서 다분히 상상화적인 수법이 강했다. 이러한 남종화에서 출발한 정선은 이후 수많은 여행을 다니면서 점차 한국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산천은 중국의 산천과 달라 한국의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이제껏 그리던 방식을 과감히 바꾸어야만 했다. 정선은 종래의 남종화의 상상화적 수법을 벗어던지고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했다. 정선은 만년에 이르러 자주적 한국 산수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진경산수를 그렸다. 정선은 실재하는 경치를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한국적인 전형미를 발굴해 낸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서 우리나라의 강토에 들어선 중국의 한 사신은 조선의 산천을 보니 비로소 정선의 그림이 신묘하다는 것을 알겠노라고 했다. 이러한 진경산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인왕재색도> <금강전도> 등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문학이 서민생활을 주제로 삼았던 것과 궤를 같이하여 미술에서도 풍속화가 유행했는데 대표적인 풍속화가로는 단연 김홍도와 신윤복을 꼽을 수 있다. 단원 김홍도는 정선과 더불어 진경산수화에 있어서도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으나 역시 그의 진면목은 현실적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속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풍속화첩에는 밭가는 풍경, 추수하는 모양, 대장간의 모습 등 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 풍속이 담겨져 있는데 서민사회의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운 흥겨움이 화면 가득 넘치고 있다
당시 천민으로 멸시받던 대장장이, 풍악장이 또는 마부나 머슴들의 생활을 생생히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김홍도가 서민사회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알았고 또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단원 풍속화의 주인공들은 얼굴이 둥글넓적한 순수한 조선인이며, 상투를 틀고 흰바지와 흰저고리를 입은 서민들이었다. 김홍도는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화가였다. 이미 나이 11세때 태자시절의 정조 초상을 그렸다고 전한다. 물론 이렇게 어린 나이에 태자의 초상을 그릴 수 있겠는가 하여 출생 연대가 의심받고는 있다. 김홍도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는데 특히 정조때 궁궐 큰 벽면에 해상군선도를 그린 일화는 유명하다 김홍도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먹물 몇 되를 단번에 갈아 받들게 하고는 의관을 벗은 다음 두팔을 걷어붙이고 붓을 들어 질풍처럼 그려나갔는데 몇 시간이 못 되어 그림이 완성되었다 한다
김홍도의 풍속화의 쌍벽을 이루는 혜원 신윤복은 단원과 달리 도시풍의 세련된 서민사회의 성풍속도를 그렸다. 곧 그네 뛰는 아낙네, 빨래하는 부인들, 술 파는 여자, 희롱하는 난봉쟁이 등 에로틱한 장면들과 무속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정취를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출생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대략 영정조 내지는 순조년 간에 살았다고 전해질 뿐이다. 유명한 화가집안의 출신인 신윤복은 직업화가였다. 그리고 여속과 춘의도를 잘 그린 속화의 명수였다. 따라서 능란한 필치로 풍속화를 그린 김홍도에 비해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신윤복은 에로틱한 여속화를 통해 조선사회의 폐쇄적이고 유교적 규범성을 역으로 비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신윤복은 당대의 쟁쟁한 화가들인 김홍도나 김득신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개성 짙은 속화를 그렸다. 기성예술과 기성사회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조선후기 미술은 정선, 김홍도. 신윤복으로 이어지면서 중국회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을 비로소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자기 것에 대한 자각과 양반 중심적인 유교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시대적 요청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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